지난 기획/특집

[가톨릭 문학산책] 12 죠르쥬 베르나노스의「환희」

곽광수 ㆍ서울대사대 불어교육과 교수
입력일 2017-06-07 수정일 2017-06-07 발행일 1992-05-31 제 1807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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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죽음통해「통공이 교리」표현
기독교 세계관에 기초, 선악 갈등 해결모색
그리스도 죽음의 의미를 강동적으로 묘사
죠르쥬 베르나노스(Gerges Bernanos)의 「환희(La joie)」는, 그의 모국인 프랑스에서도 그에게 그리 많은 독자들을 불러 모으지 못하게 하는 그의 난해한 소설에게 가운데서도 특히 난해한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베르나노스의 작중 인물들 가운데 대표적인 비성직자 성년적 주인공인 샹탈 드 클레르주리라는 무구한 처녀가 비극적으로 살해되는 것으로 끝나는 이 소설이「환희」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는 사실부터 난해하다.

기실 그 무구한 주인공 처녀의 죽음은 이 작품의 핵심적인 비밀이 되어 있는데, 베르나노스의 소설세계에 편재적으로 나타나는 테마인 죽음이라고 여겨진다. 사실 그의 처녀작 「사탄의 태양 아래서(Sous Ie Soleil de Stan)」에서부터 바로 죽음에 대한 명상 자체라고나 할 「가르멜 수녀들의 대화(Dilogues des Carmelites)」에 이르기 까지 그의 어느 작품에서나 주인공은 어떤 방식으로서든지 죽음을 맞이하거나 또는 남을 죽이기도 한다.

「환희」의 주인공 샹탈드 클레르쥬리의 죽음이 베르나노스의 소설세계에서 대표적으로 비극적이라고 여겨지지만, 그러한 비극성은 긍정적인 주인공들인 성인적인 주인공들에게 공통적이다. 우선 그들은 우리들이 그런 성인적인 인물들에게 흔히 상상하는, 평화롭고 두려움 없는 죽음을 맞이하지 못한다. 「환희」와「기만(L’gmposture)」에 동시에 나오는 대표적인 베르나노스적 성인적 성직자 인물의 한 사람인 슈방스 신부는(「환희」와 「기만」은 본디 한 작품으로 구상되었던 것인데, 작가가 처해 있던 여러 어려운 상황 때문에 두 작품으로 토막나고 만 것으로, 샹탈역시 「기만」에도 등장한다) 죽음을 마주하고 비참할 정도로 죽음의 두려움과 삶에의 미련을 드러낸다. 그의 영적인 지도를 받아 온 샹탈이 그의 임종을 지키고 있을때, 그는 그녀에게 띄엄 띄엄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난 죽고 싶지 않아』『죽기란 힘들어』『즐겨 죽으려는 사람은 없을거야』샹탈이 그에게 죽음을 잠시라도 잊게 하기 위해 자기를 축복해 달라고 하자, 그는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한다 : 『내일이면 흙에 지나지 않을 사람의 축복이 무슨 그리 값나가는 것일거라고?』어릴때부터 자기의 영적도자의 참된 성성(聖性)에 대한 사랑과 숭앙 가운데 자라온 샹탈은 은밀한 실망감을 떨치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 어쩌면! 그에 그리도 어려운가요? (…) 신부님은 평정하고 다사롭고 몽롱하지 않은 임종을 맞으실 거라고들 사람들은 말했는데요. 』임종에서의 슈방스 신부의 비참한 모습이 유명한 극작가 앙토넹 아르토 (Antonin Artaud)로 하여금 베르나노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슈방스 신부의 죽음에 대한 당신의 묘사는 제게 지금까지 제 평생에서 가장 슬프고도 가장 절망적인 감동의 하나를 느끼게 했습니다』고 쓰게 했다는 것은 베르나노스 연구가들이 흔히 인용하는 유명한 일화이다.

그러나 슈방스 신부의 죽음에 있어서 그 비극성은 죽음자체에 있는 것으로서, 영원을 갈구하는 인간의 죽음과의 비극적인 조우 (遭遇)는 낭만주의 문학에서 이미 중요한 테마의 하나였다. 반면 샹탈의 죽음의 비극성은 죽음 자체에만 있는 게 아니라, 그 죽음의 잔혹성에 오히려 더 크게 기인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샹탈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은 물론「환희」에서인데, 그러므로 「기만」의 끝에서는 슈방스 신부가, 「환희」의 끝에서는 샹탈이 죽게 된다. 샹탈의 죽음을 이야기하려면, 「환희」의 무대를 잠간 살펴 보아야 하겠다. 「환희」의 무대는 샹탈의 아버지 드 클레르쥬리씨가 북불 어느 시골에 소유하고 있는 별장인데, 거기에 기거하고 있는 사람들은, 병약한 며느리를 정신적인 학대로 죽게하고 그에 대한 회한으로 미쳐버린 샹탈의 할머니, 아카데미 회원에 당선되기 위해 정략결혼으로 재혼을 서두르고 있는 아버지 드 클레르쥬리씨, 여기 저기 추천으로 아버지가 들여온 수상한 과거의 하인들, 그 위에 더위를 피해 방문객으로 오서 기식하고 있는 드 클레르쥬리씨의 저명인사 친구들이다. 이와 같은 많은 사람들을 위한 사림을 책임지고 있는 것이 아직 나이어린 처녀 샹탈이다. 베르나노스는 샹탈을 통해 어린이 정신, 환희, 전적인 헌신의 의지 등으로 요약될수 있는 그의 성인적 이상의 중요한 측면을 구현시키고 있다 그녀 주위의 인물들은 할머니로부터 하인들에 이르기까지 어는 한 사람, 보살피고 다루기에 힘겹지 않는 사람이 없으나, 그녀는 단순한 용기와 기쁨을 언제나 잃지 않고 안주인으로서의 의무를 헌신적으로 해나간다. 그런데 하인들 가운데 제정 러시아 장교 출신인 명민하고도 사악한 표도르라는 인물이 있다. 샹탈은 언제부터인가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신비 체험을 하게 된는데, 이것을 표도르에게 발견 당하고, 이때부터 그녀는 끊임없이 표도르의 엿봄의 대상이 되어, 그는 그녀와 단둘이 마주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녀가 정신이상자라는 악의에 찬 암시를 던진다.

그러나 기실 표도르는 그녀의 순수성과 자기에게 대한 연민의 감정을 파악하고 있고, 오히려 그것이 그의 귀족적 자존심을 괴롭힌다. 그는 자학적으로 스스로 자존심에 상처를 내고, 마침내 그녀를 권총으로 쏘아 살해하고 자기도 자살해죽는다…이로써 알 수 있듯이 샹탈의 죽음은 너무나 무구하고 터무니 없고 잔혹한 죽음, 한 마디로 이를테면 부조리(absurde)한 죽음을 구현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이러한 성인적 인물들의 비극적인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앞질러서 한마디로 말하면, 베르나노스에 있어서 성인적 인물의 죽음은 가톨릭 교리에서 말하는 통공의 교의(Communion des saints)로 표현되는 기독교의 진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내가 겪은 괴로움으로 쌓은 공을 날의 죄의 보속을 위해 쓸수 있다는 이 통공의 교의는 바로 기독교적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라고하겠다. 「기만」의 주인공은 세나브르라는 신부인데, 베르나노스는 세나브르 신부를 통해 악의 원형으로서의 거짓을 구현시키려고 했다.

그에 의하면 악의 본질은 거짓이며, 소설가로의 그의 가장 야심적인 주제의 하나가 거짓이었다. 세나브르 신부는 성직을 거짓으로 수행하는 인물로서,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나 오직 뛰어난 지능과 거짓 성소(聖召)로써 걸출한 학자 신부로 성공한 인물이다. 신 자신을 정면으로 속이려는 이와 같은 독성죄로 영겁의 지옥벌에 이미 예정되었을 이 무서운 신부를 보속하려고 태어난 듯한 사람이, 바로 그의 동료인 슈방스 신부와 그의 가까운 지기인 드 클레르쥬리씨의 딸 샹탈인 것이다. 슈방스 신부의 죽음만으로는 세나브르 신부의 구령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그 임무는 샹탈에게 넘겨지게 된다. 세나브르 신부는 드클레르쥬리씨의 별장에 와서 여러 심방들과 함께 한 여름을 보내다가, 샹탈의 죽음 뒤에 필경 구령을 받게된다. 슈방스 신부와 샹탈의 죽음이 통공의 교의의 표현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샹탈의 신비 체험에서 그녀가 보는 환영을 통해 그리스도의 수난이 환상적인 아름다움으로써 감동적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슈방스 신부와 상탈의 죽음을 통공이 교의로써 이렇게 요약해 설명하는 것은 너무나 공식적인 설명처럼 보이지만, 도스토에프스키 소설의 괴이한 분위기에 시적인 아름다움이 더해진것 같은 환상적인 분위기 가운데 독자들은 어쩔 수 없는 홀림과도 같음 느낌을 강요당하며 그 두 성인적 인물의 죽음의 필연성에 설득되는데 바로 이것이 작가의 탁월한 능력이라고 하겠다. 이제 여기서 우리들은 주인공의 그러한 잔혹한 죽음으로 끝나는「환희」의 그 비의적인 제목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 기쁨은 바로 통공이 표현하는 사랑의 기쁨이 아니겠는가?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유다를 생각하고 그를 위해 빌었을 때의 감정이 바로 그 기쁨이 아니었겠는가?

지금까지 이 글에서 「비극적」이라는 말을 막연하게 써 왔는데, 이제 샹탈의 죽음을 위에서 설명된대로 통공의 교의즉 기독교적 사람의 맥락에서 이해한다면, 그 말의 뜻을 기독교적인 세계관에 비추어 좀더 깊이 헤아려 보아야 하겠다. 통공을 위한 사람의 행위로서의 죽음의 가장 대표적이고도 위대한 것은, 말할 나위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의 죽음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기독교적 세계관의 상징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적 세계관에는 두가지 전제가 있는데, 그 하나는 이 우주 전체가 전지전능하고 지선한 창조주에 의해 통일적으로 주재되어 있다는 일원론적 우주발생론과, 다른 하나는 다른 종교들이나 한결 넓게 모든 형태의 신화적 사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고통스러운 의문으로 제기되는 부조리와 악이 횡행하는 이 세계의 배리(背理)이다. 전지전능하고 지선한 신이 어찌 이 세계의 악을 내버려 두는가? 기독교적 세계관은 바로 이 모순을 해결하려는 신화적 사상인 것이다. 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지전능한 유일신적 일원론에 악을 수렴시켜야 하는데, 그 방식이 바로 기독교적 사랑이다. 이 사랑의 구약적인 표현이 원죄신화이고, 신약적인 표현이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의 죽음이라고 하겠다. 원죄신화의 핵심은 선악과의 이야기인데 선악과의 참 의미는 인간을 시험하려는 신의 의도에 있는게 아니라, 스스로를 모상으로 하여 창조한 인간에게 스스로의 전능의 표징인 자유를 주려고 한 신의 사랑에 있는 것이다.

즉 인간에게 허여된 선악의 선택의 자유는 바로 신의 사랑의 표현이다. 그러나 신의 사랑이 비극적인 빛깔을 뚜렷이 드러내는 것은 물론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이때의 신의 사랑은 첫번째 사랑이 표현이었던 인간의 자유로 인해 야기된 원죄 이후 실추된 이 세계에 신성을 되찾아 주기 위해서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 그리스도 즉 신 자신이 인자로서의 죽음까지 당했다는 사실의 깊은 의미는 게대로 이해되지 못하는 수가 많다. 그 깊은 의미는 천상과 지상의 화해를 나타내는 그 사랑 자체에 심각한 대립과 갈등이 잔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의 죽음을 요구할만큼 악이 군림하는 이 세계에 대한 거부와, 그럼에도 그것이 신의 피조물이기에 버릴 수 없는 이 세계에의 포옹-이 양자 사이의 긴장을 통해 표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변증법적 지양처럼 존재하는 이와 같은 신의 사랑, 기독교적 사랑은 두 대립항인 선과 악, 천상과 지상 사이의 갈등이 크면 클 수록 더 강렬히 표현된다고 할 수있을 것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기독교의 진리인 사랑이 더욱 더 크게 현현하려면, 악의 군림도 더욱 더 드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지선한 신까지 굴욕적인 죽음을 당하기에 이른 것이다. 기독교적 세계관, 기독교적 사랑이 본질적으로 비극적이라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이 사랑이 존재 조건 자체가 선악의 갈등이며, 사랑이 그 갈등에 똑바로 비례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죽음이 기독교적 세계관의 상징 자체라고 나는 말했던 것이다. 그리고 샹탈의 죽음은 바로 그 상징의 다른 한 표현인 것이다.

곽광수 ㆍ서울대사대 불어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