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우리교구 이곳저곳] (22) 단내성지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7-06-05 수정일 2017-06-05 발행일 2017-06-11 제 3048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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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깊은 교우촌이 성지로…
기도하는 이들 모여드는 아늑한 신앙 요람

단내성지 입구의 성가정상.

산에 둘러싸인 아담한 공간. 정갈하게 깔린 잔디 주변에는 순례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휴식을 취하고, 또 기도하고 있었다. ‘아늑하다’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 성가정성지, 이천 지역 신앙의 요람인 단내성지를 찾았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성지에 들어서니 성가정상 옆으로 입구 바닥에 큼직하게 성경구절이 새겨져 있었다. 이곳은 박해시대 신자들에게 낙원과도 같은 곳이었다. 바로 신앙인으로 둘러싸인 교우촌이었기 때문이다.

성지는 교우촌 중에서도 단연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교우촌이다. 특히 이천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신앙이 뿌리내려진 곳이다. 모진 박해로 신자들이 모두 흩어져버려 자취만 남은 다른 교우촌들과 달리, 신앙선조의 후손들이 여전히 신앙을 이어오고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성지에 조성된 정은 순교자의 묘(오른쪽)와 그의 재종손 정양묵(왼쪽) 순교자의 묘

단내에 신앙의 뿌리가 내리기 시작한 것은 한국교회의 시작과도 맥을 같이 한다. 1779년 겨울, 이기양의 아들 이총억은 권철신(암브로시오)의 문하생으로서 천진암에서 열린 강학회에 참석했다. 이 강학은 바로 서적을 통해 교리를 탐구하고 이를 실천하던 모임이었다. 이기양 역시 이익의 제자이자 권철신과 친밀한 사이였다. 이기양은 외가인 동래 정씨가 살던 단내에서 생활했다. 단내에 마을을 이루던 정씨 일가도 실학사상에 영향을 받아 일찍이 서학, 즉 천주교를 학문으로 접했다. 또 그 이기양의 사촌이었던 정섭, 정옥 등도 교리를 익혀 신앙인으로 살아갔다.

먼저 성당을 찾았다. 제대 앞에 성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보였다. 이곳은 김대건 신부와도 인연이 깊은 곳이다. 김대건 신부가 1845년 사제품을 받고 사목활동을 하던 교우촌 중 한 곳이기 때문이다. 성당 옆 야외제대 옆에는 김대건 신부상도 세워져 있다.

김 신부가 이곳을 방문하는 시간은 늘 밤이었다고 한다. 복사가 먼저 와서 김 신부의 도착을 알리면, 신자들은 이웃들 모르게 몰래 벽에 깨끗한 종이를 붙여 십자가를 걸고 성사 볼 준비를 했다. 이와 관련해 교우촌에서는 전해져오는 이야기가 있다. 성사를 마친 김 신부는 으레 자신을 전송하러 나오는 신자들에게 “내가 이렇게 밤중에 다니는 것은 나 자신보다도 교우들에 대한 외인의 이목 때문이니, 부디 나오지 말고 집 안에 있으라”고 만류했다는 것이다.

성지 전경. 성당(왼쪽)과 야외제대, 순교비가 보인다.

성지에 세워진 순교비 옆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묘지가 보였다. 바로 정은과 정양묵(베드로) 두 순교자의 무덤이다. 이들은 동래 정씨 순교자들이다.

정은 순교자는 신유박해가 끝난 후인 1804년에 태어났다. 천주교 신자였던 이기양, 정섭, 정옥 등의 사촌 형들이 박해로 유배되거나 사망했기에 가족에게 직접 교리를 배우지는 못했지만, 성장하면서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정은은 가족과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며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고, 그의 노력으로 단내는 교우촌으로 뿌리내리게 됐다.

하지만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정은 역시 신자로 고발돼 포졸들에게 잡히고 만다. 정은이 잡혀가자 재종손인 정양묵(베드로)은 “나도 천주교 신자”라면서 “대부(代父)를 따라 치명하러 왔으니 나도 죽여주시오”라고 말하고 스스로 잡혔다. 남은 가족들은 정은의 시신은 찾았지만, 정양묵의 시신은 찾지 못했다. 대신 순교자의 시신을 버리던 남한산성 동문 밖의 흙을 퍼와 정은의 묘 옆에 정양묵의 묘를 만들었다.

성지가 성가정성지로 유명한 것은 성지에서 현양하는 순교자들이 대부분 가족들이기 때문이다. 정은과 정양묵은 할아버지와 종손자 사이, 이호영(베드로)과 이(아가타)는 남매, 조증이(바르바라)와 남이관(세바스티아노)은 부부 사이다. 이문우(요한) 역시 모친에 대한 효성이 극진하기로 유명했다. 이곳에서 사목활동을 했던 김대건 신부 부자도 순교성인이다. 이들 모두는 가족이 함께 굳은 신앙을 증거한 가정 성화의 모범이다.

성지에 조성된 십자가 화단.

하지만 성지에서 묵상할 수 있는 성가정의 모습은 비단 순교자들의 모습만은 아닌 듯 하다. 성지를 따라 산을 오르다보면 박해시기 신자들의 생활도 묵상해 볼 수 있다.

정은의 순교 이후 포졸들은 정은의 가산을 몰수하고 그 가족들도 잡기 위해 교우촌을 헤집고 다녔다. 가족들은 이런 박해자들의 칼날을 피해 와룡산 계곡을 따라 올라 바위동굴에 숨어 기도했다고 전해진다. 남은 가족들은 30여 년을 산 속을 옮겨 다니며 살다가, 1900년이 돼서야 이곳 단내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긴 고난의 시간을 인내와 사랑으로 이겨낸 순교자들의 가족이 감내했던 삶을 생각하면, 성가정을 이루는 길은 순교자의 길만큼이나 큰 신앙과 순교정신이 필요함을 느낄 수 있다.

와룡산 정상에 세워진 예수성심상에서 1㎞ 가량 가면 정은의 가족들이 피난생활을 했다는 굴바위가 나온다. 또 굴바위에서 와룡산 능선을 따라 1.6㎞ 가량 가면 정은이 박해를 피해 숨었다던 검은바위를 만날 수 있다. 이 순례길은 왕복 5.2㎞ 가량 거리로, 1시간30분 정도면 오갈 수 있다.

성지 마당의 성가정상.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