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도 병원도 못 가는 ‘있지만 없는 아이들’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의 수가 200만 명(2016년 6월 30일 기준)을 돌파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이주민 복지는 여전히 열악하다. 특히 ‘취약하고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주아동의 현실은 위태롭기까지 하다. ‘세계 이민의 날’을 맞아 국내 이주아동, 특히 출생신고도 하지 못해 존재 자체가 ‘불법’으로 여겨지는 무등록 이주아동들의 실태를 살펴본다.
코트디부아르 출신으로 난민 판정을 받은 ‘실비’(가명)의 부모는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다. 내전이 끝나면 돌아갈 생각이었다. 한국에 들어와 몇 년 뒤, 딸 실비를 낳았지만 한국 주재 코트디부아르 대사관에 가서 출생신고를 할 수가 없었다. 강제 송환 등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실비는 벌써 다섯 살이 됐지만, 한국 땅에선 ‘없는’ 아이다. 존재 자체가 ‘불법’이었다. 열여섯 살 인호의 주민등록번호에는 생년월일로 된 앞자리에 이어 ‘0’이 일곱 개 나란히 붙어 있다. 이주노동자로 한국에 왔던 중국인 부모가 출생신고를 하지 않아 받게 된 임시번호다. 주민등록번호가 없으니 보험 적용을 받지 못한다. 아파도 참아야 한다. 휴대폰도 남의 이름으로 등록했고, 당연히 청소년 요금제 적용도 받지 못한다. 인호는 ‘내 이름’으로 된 저금통장을 갖는 게 꿈이라고 한다. 중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란 인호는 처음에는 ‘한국어 미숙’으로, 이후엔 한국 국적자만 발급받을 수 있는 가족관계등록부와 주민등록등본을 제출하지 못해 학교에도 못 간다. 게다가 이주아동 중에선 선천성 뇌성마비로 고통을 받고 있지만, 부모의 불법 체류 신분 탓에 장애인 판정을 받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 가장 큰 두려움 ‘강제 추방’ 이들에게 무엇보다 가장 큰 걱정거리는 불법 체류 신분이 발각돼 강제 추방되는 일이다. 네 살배기 인혜(가명)는 밀항한 엄마 박 모(37세)씨와 함께 거의 한달 동안 충북 청주 외국인보호소에 구금돼 두려움 속에서 강제 출국을 기다려야 했다. 철창 안에서 스트레스를 받은 인혜는 고열과 불면에 시달렸다. 우울증과 불안 장애도 고스란히 아이의 몫이었다. 열일곱 살 민우는 일곱 살 되던 해에 부모를 따라 몽골에서 한국으로 이주했다. 스스로 ‘한국인’이라 생각하지만, 법적으론 ‘불법 체류자’였다. 친구들과 우연히 싸움에 휘말렸고, 경찰은 민우가 ‘미등록’인 것을 확인하고 외국인보호소로 보냈다. 민우는 닷새 만에 수갑을 찬 채 공항으로 이송, 몽골로 강제 추방됐다. 민우는 그 사이에 부모를 만나지도 못했다. 우리나라가 27년 전에 가입한 ‘유엔아동권리협약’은 이주아동의 구금을 금지한다. 국제법은 18세 미만을 아동으로 규정하고 있다. 특히 부모 없이 아동만을 강제 송환하는 것은 아동인권 침해로 간주된다. 민우는 불법 체류자 이전에 ‘아동’이라는 사실을 우리 법체계는 무시한다. ■ 검토조차 안 되고 폐기된 ‘이주아동권리보장 기본법’ 지난 18대와 19대 국회에서 추진됐던 ‘이주아동권리보장기본법’은 무등록 이주아동의 이 같은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시도였다. 이 법안은 이주아동에게 출생 등록의 권리를 부여하는 것으로, 불법 체류자 자녀도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출생신고를 하도록 규정했다. 또 이주아동에게 특별 체류 자격을 부여하고, 부모가 강제 퇴거 대상이더라도 자녀는 특별 체류 기간이 끝날 때까지 강제 퇴거를 유예하도록 했다. 의무 교육과 의료 지원 등을 아동의 권리로 인정하고 정부와 지자체가 필요한 지원을 하도록 규정했다. 18대 국회 때 당시 한나라당 소속 김동성 의원이 2010년 10월 22일 ‘이주아동권리보장법’ 제정안을 발의했다. 이 법안은 이듬해 4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이하 법사위) 전체회의에 상정, 법안심사 1소위에 회부됐다. 그리곤 ‘끝’이었다. 19대 국회에서는 2014년 12월 18일 이주민 출신인 당시 새누리당 이자스민 의원 등 23명이 법안을 발의했다. 법사위엔 다음날 회부됐고, 2015년 4월 법사위 전체회의, 법안심사 1소위에 회부됐다. 다시 또 그것이 ‘끝’이었다. 두 번의 법 제정 시도는 모두 제대로 검토조차 되지 않은 채 흐지부지, 결국은 임기 내 처리되지 못한 채 폐기됐다. 20대 국회에서는 발의조차 되지 않았고, 결국 이주아동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왜 그랬을까? 왜 두 차례의 법 제정 시도가 무산됐을까?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