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순교자를 만나다] 성 정하상 바오로

최용택 기자
입력일 2017-04-11 수정일 2017-04-11 발행일 2017-04-16 제 3040호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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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에 북경 방문… 조선 상황 전하고 선교사 요청

경기도 양평성당 앞마당에 서 있는 성 정하상의 동상. 호교서 「상재상서」를 들고 서 있다.

정하상 바오로 성인은 신유박해(1801년)로 침체된 조선교회를 재건하고, 성직자 영입운동을 통해 조선교구 설정을 이끈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평신도 지도자다.

성인은 1795년 경기도 양근의 분원(현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어머니는 성녀 유소사 체칠리아다. 성인은 이들 부부의 둘째 아들이며, 그의 여동생은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이다.

1801년 아버지 정약종과 이복형 정철신이 신유박해로 체포돼 순교하자, 성인은 어머니 유소사, 동생 정정혜와 함께 정약종의 고향인 마재(현 남양주군 와부읍 능내리)로 이주했다. 성인의 가족들은 비난과 핍박을 받았지만, 신앙생활을 포기하지 않았고 오히려 굳센 신앙으로 이를 극복했다.

청년이 된 성인은 교회 재건에 몰두했다. 성인은 만 21세 때인 1816년, 처음으로 북경을 방문해 조선교회의 사정을 전하고 선교사를 요청했다. 1825년, 성인은 역관 출신인 유진길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교황과 북경 주교에게 탄원서를 보내 조선교회를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이러한 노력은 마침내 교황청이 1831년 조선교회를 북경대목구에서 독립시켜 조선대목구를 설정하도록 이끌었다.

1836년, 마침내 성인은 파리외방전교회의 모방 신부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는데 성공했다. 성인은 같은 해 말, 최양업과 김대건, 최방제 등의 신학생을 이끌고 중국으로 향했으며, 돌아오면서 샤스탕 신부의 입국을 도왔다. 또 이듬해에는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를 맞아들였고, 이후 주교의 복사로 활동하면서 교우촌을 따라다녔다.

성인의 신앙과 재능 등 됨됨이를 알아본 앵베르 주교는 성인에게 직접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치며 사제가 될 수 있도록 준비를 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면서, 성인의 사제품도 물거품이 됐다.

성인은 체포와 순교를 예상하고 박해자들에게 제출할 호교론을 직접 작성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상재상서」다.

성인은 여러 차례의 혹독한 심문 과정에서도 굳건히 신앙을 증거했다. 성인은 1839년 9월 22일 유진길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됐다. 당시 그의 나이 44세였다.

■ 성인 발자취 만날 수 있는 곳 - 천진암성지

천진암성지 조선교구 설립자묘역에 있는 성 정하상의 묘.

서소문 형장에서 참수된 성인의 시신은 고향 인근인 배알미리(현 하남시 배알미동)에 묻혔다.

잊혀졌던 성인의 묘소는 1981년 당시 하남 신장본당 주임으로 사목 중이던 변기영 몬시뇰이 발견했다.

하지만 관리 소홀로 토지 소유주가 파묘(破墓)하고 소각해, 성인의 유해는 소실됐다.

천진암 가르멜수녀원 수녀들은 파묘된 묘지 주변에서 성인의 유해로 추정되는 치아 1개와 뼈마디 2개 등 유해 3점과 뼛가루, 관조각 등을 찾아 천진암성지에 있는 한국교회 창립 유공자 제2묘역에 안장했다.

천진암성지 전경.

최용택 기자 johncho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