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 토마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며, “의심을 버리고 믿으라”고 말한다. 그리고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가르친다. 토마스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새겨야할 말씀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적힌 성경을 ‘볼’ 수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필사’하고, 성경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을 마음에 새기면서 부활의 기쁨을 누린 이가 있다. 시각장애인 김헌수(요셉·57·수원 동수원본당)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보지 않고도 믿는’ 행복한 삶, 성경 말씀을 통해 새로운 빛 속에서 이어가는 부활의 삶을 살아가는 김씨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 타각, 타각, 탁, 타각.
오른손에 굳게 쥔 점필로 점관에 패인 홈을 따라 점자지를 찍는다. 오른손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점자를 찍는 동안, 왼손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점자 성경에 새겨진 말씀을 읽어나간다. 고요한 방안에 금속 부딪히는 소리만이 울린다. 어쩐지 운율마저 느껴지는 금속음은 마치 기도소리처럼 느껴진다.
필사하는 김헌수씨를 보고 있어도, 어떤 말씀을 쓰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저 김씨의 입가에 이따금씩 피어오르는 미소를 보며, 그 내용이 정말로 ‘기쁜 소식’임을 짐작할 따름이다. 성경 필사 한 장 분량을 마친 김씨가 말했다.
“이렇게 성경을 찍으면 1시간에 3장 정도 찍어요.”
김씨는 점자로 성경을 필사하는 일을 “찍는다”고 표현했다. 말 그대로 종이를 찍어야만 점자를 종이에 새길 수 있기 때문이다.
3점씩 2줄, 마치 주사위의 6처럼 생긴 자리에 볼록하게 튀어나온 점을 새기면 한 글자가 만들어진다. 자음과 모음을 병렬로 표기하기 때문에, 한 글자를 적으려면 점자로는 많게는 세 글자를 써야 한다. 그렇다보니 일반적인 성경 필사보다도 그 양이 많다. 김씨가 신구약 전 권을 필사한 점자지는 약 4500장. 도저히 1권으로 묶을 수 없어 주교회의에서 발행한 「점자 성경」 순서에 맞춰 23권으로 묶었다.
“점자를 이렇게 많이 찍어본 적이 없어요. 점자 쓰는 일은 정말 고되고 힘든 일이었지만, 성경을 찍는 내내 너무 기뻐서 계속 찍고 싶다는 기분이었어요.”
2013년 수원교구 시각장애인선교회 25주년을 맞아, 시각장애인선교회 담당이었던 배경희 수녀는 신약성경을 점자로 필사해보자는 제안을 했다. 이미 수원교구 성경잔치 성경암송대회 등에 참가하면서 성경에 맛을 들이던 김씨는 이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 1년 만에 필사를 완료했다. 그러면서 성경 필사가 얼마나 기쁜 일인지를 깨달았다. 틈나는 대로 구약을 필사하기 시작해 지난 2월엔 신구약 전 권의 필사를 마쳤다.
사실 시각장애인들이 점자를 기록하는 일은 많지 않다. 점자는 대체로 글을 읽기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이다. 점자는 점자를 배운 사람만이 읽을 수 있다. 게다가 점자문서는 부피가 커 휴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시각장애인들은 기록이 필요할 때 점자보다는 녹음기 등을 활용한 음성기록을 자주 한다.
점자를 기록하는 일 자체도 쉽지 않다. 말할 것도 없이 우선 점필과 점관, 점자판, 점자지를 모두 갖춰야 한다. 글자를 뒤집어서 거꾸로 찍는 일도 보통 번거로운 게 아니다. 종이 위로 볼록하게 튀어나온 점자를 만들기 위해선, 종이 뒷면에서 점을 찍어내야 한다.
더구나 김씨는 스무 살에 시력을 잃어 뒤늦게 점자를 배웠기 때문에, 점자를 읽고 쓰는 감각이 무뎌 큰 어려움을 겪었다. 평소 바닥에 앉아 점자를 찍다보니 허리에 무리가 와 병원진료도 받았다. 하지만 김씨에게 성경 필사는 구원을 향해 가는 부활의 기쁨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