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우리교구 이곳저곳] (19) 소화초등학교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7-03-07 수정일 2017-03-08 발행일 2017-03-12 제 3035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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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여 년간 어린이들에게 ‘하느님·이웃 사랑’ 교육

1934년 소화강습회로 시작해 현재까지 지역 어린이 교육을 이끌어온 소화초등학교의 전경.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교훈이 보인다.

예수가 어린이를 사랑했듯, 교회는 어린이들을 보호하고 교육하며 사랑을 전하는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 교구에도 어린이들을 위해 마련한 터전이 있다. 바로 교구 학교법인 광암학원 산하 소화초등학교다.

‘새로운 소화가족 신입생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수원 영통구 원천동에 자리한 소화초등학교 입구에 현수막이 걸려있다. 새로 들어오는 신입생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다.

교문을 들어서니 먼저 교훈이 눈에 들어왔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교훈은 ‘애주애인’(愛主愛人)을 우리말로 풀어쓴 것이다. 설립자인 폴리 데시데라도 신부(파리외방선교회, 한국이름 심응영)가 어린이들을 사랑했던 그 마음을 물씬 느낄 수 있는 교훈이다.

설립자 폴리 신부의 1945년 모습.

폴리 신부는 1931년 수원본당(현 북수동본당) 주임으로 부임했다. 폴리 신부는 일제 치하에서 인권을 박탈당하고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교육이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했다. 이어 교육을 구체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1934년 소화강습회를 열었다.

폴리 신부는 평소 사람들을 엄하게 대했지만, 어린이에게는 한없이 사랑을 베푸는 성품으로 유명했다. 어린이들이 사제관에 모여들어 놀고 유리창을 깨도 폴리 신부는 모르는 체 할 때가 많았다. 직접 과자를 사다 어린이들에게 나눠주며 친하게 지내기도 했다.

폴리 신부에게 누가 “아이들이 저렇게 소란을 피우는데 어떻게 견디십니까”하고 물으면 “내버려두게나. 그게 아이들이야. 천진성을 잃으면 이미 아이들이 아니지”라고 대꾸하곤 했다.

폴리 신부는 일제강점기 속에서도 강습회를 통해 어린이들에게 한글과 교리를 가르쳤다. 성당도 채 짓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폴리 신부는 강습회부터 먼저 열었다. 소화강습회는 초등교육기관으로서 탄탄히 기틀을 잡아나갔고, 1945년에는 소화국민학교 인가를 받아 본격적으로 교육사업을 펼쳐나갔다.

1954년 소화국민학교 석조 건물.

후임 교장 신부들도 폴리 신부의 뜻을 꾸준히 이어나갔다. 1950년 6·25전쟁으로 임시휴교하고 1951년 다시 개교했을 땐, 전쟁의 여파로 교사가 모두 불에 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 수업은 천막과 노천에서 이어나갔다.

당시 수원본당 주임이자 학교장이었던 이복영 신부는 수원 지역에 새 성당을 짓는 일보다 학교를 재건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보고, 새 성당 설립을 보류하고 먼저 학교교사 신축을 추진했다. 이때 지은 교사는 아직도 북수동성당 옆에 남아 현재 ‘폴리화랑’으로 사용되고 있다.

북수동성당 부지에 자리하던 소화초등학교가 지금의 장소로 이전된 것은 2002년의 일이다. 새 교사는 자연경사 지형을 이용해 환경친화적으로 건축물을 배치하고 지하 2층까지 자연채광이 되도록 설계돼 2003년에 수원시 건축문화상 금상을 받기도 했다.

1960년대부터는 어린이들이 여러 문화를 배우며 전인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바이올린 등 악기교육에서부터 스카우트 활성화, 학교신문 발간, 예술제 개최, 빙상부 조직 등을 통해 어린이들이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게 했다.

1972년에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자유학습의 날’을 지정, ‘책가방 없는 토요일’을 전국에 퍼뜨렸다. 설립 당시부터 이어온 종교교육도 지속,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애를 본받아 국가사회와 세계 복음화에 기여하는 인간을 육성한다’는 건학 이념에 따라 어린이들을 육성하고 있다.

소화초등학교는 지금까지 5721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현재는 500여 명의 학생들이 이 학교에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배우며 자라고 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