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49·끝) 클라우스 헴멀레 주교 (5)

최대환 신부 (의정부교구 안식년)
입력일 2016-12-20 수정일 2017-08-29 발행일 2016-12-25 제 3025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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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움에 처한 노동자와 연대… 탄광 직접 방문하기도

클라우스 헴멀레 주교(왼쪽)가 광부들과 함께했다. 출처 www.iu-sophia.org

■ 복음 안의 삶, 동반의 여정, 일치의 추구 : 헴멀레의 주교직

1975년,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교수로 봉직하던 중 헴멀레는 예상치 않게 비교적 젊은 나이에 신생 아헨교구의 주교직을 맡게 됩니다. 그리고 1994년 1월 23일 주일 아침 그 전 해에 알게 된 갑작스런 암이 악화돼 65세라는 아직 아까운 나이로 선종하기까지 착한 목자로서 주님의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였습니다.

그의 주교직의 근원은 일상 안에서 이루어진 깊은 하느님 체험과 복음에 대한 조건 없는 신뢰와 응답이었습니다. 그는 주교가 된 후 첫 번째 사목서한에서 ‘자신은 복음 외에 다른 프로그램을 내세우지 않는다’라고 밝히기도 했지요. 그리고 그는 이러한 복음에의 헌신과 하느님 체험을, 홀로 고립된 삶이 아니라 늘 사람들과의 만남과 동반을 통해 실현하려 했습니다. 주교로서도 그는 교구민들을 이끌 뿐만 아니라, 자신이 교구민 모두와 함께 지상의 여정을 순례하며 복음을 실천하는 동반자라는 사실을 말하고 행동으로 실천했습니다. 모든 이들을 말씀 안의 형제라고 칭했습니다. 또 모든 신자 한 명 한 명이 자신이 주체성과 공동 책임성을 깨닫고 자유롭고 기쁘게 복음에 헌신하기를 소망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주는 글 중 하나가, 정치적으로나 교회 내적으로나 독일에 있어 변혁의 시기였던 1989년에 교구민들에게 보낸 ‘사순절 사목서한’ 일 것입니다.

“올해 사목서한에서는 보통 때와는 좀 다르게 말하고자 합니다. 이번에는 제가 여러분들께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오히려 여러분들의 말을, 충고를 듣고 싶습니다… 저에게 여러분들의 근심, 희망, 경험, 영감들을 알려 주십시오. 저에게 편지로 써 보내 주십시오! 여러분들은 혼자서나 공동체 차원에서 함께 작업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 주십시오. 우리는 모두 서로가 (복음과 하느님 체험을) 증언하고 봉사하는 길을 함께 걷는 공동체에 속해 있습니다. 그 한가운데 주님께서 우리를 미래로 인도하십니다.”

그는 또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 상황에 함께하려 하고 도우려 진심으로 애썼습니다. 그리고 외적인 부유함이 아니라 ‘복음적 청빈’의 정신이야말로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는 올바른 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가 정치적인 정파에 휘말리는 것에 대해서는 신중함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러한 두려움 때문에 도움이 필요하고 목소리가 필요한 사람들 옆에 서는 것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이들과 함께하려 애썼습니다. 그는 주교가 되어서 그간 자신이 익숙했던 교회나 대학에서 경험하지 못한 도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노동운동의 세계였지요. 그는 진심으로 노동자들에게 배우고 공감하고, 또한 갈등 당사자들의 화해와 대화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런 모습이 잘 나타난 것이 1991년 탄광 폐쇄에 항의하여 터키 이주민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갱도에서 파업한 광부들에게 연대를 표현하기 위해 탄광을 직접 방문한 일이었습니다. 헴멀레 주교와 광부들 사이에서 자라난 진실된 존중은 헴멀레가 선종한 후 탄광의 노동조합이 신문에 실은 조의 광고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조용하면서도 끊임없이 일치와 대화, 상호 존중과 이웃사랑, 연대의 길을 추구한 헴멀레의 삶과 영성의 중요한 원천 중 하나는 젊은 시절 만난 포콜라레 영성이었습니다. 그는 포콜라레를 통해 복음에 충실하며 대화와 일치의 삶을 살아가는 구체적 길을 발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포콜라레 운동을 시작한 키아라 루빅 여사의 존재는 큰 영감이 되었으며 또한 그녀에게 포콜라레 영성을 신학적으로 정립하는 작업의 중요성에 대해 제언하기도 하였습니다. 포콜라레 영성을 시작한 키아라 루빅 역시 헴멀레 주교의 인격과 영성을 높이 평가하였고, 그의 사후, 그에 관한 질문에 대해 헴멀레는 시대를 초월하는 신앙인의 귀감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성탄을 맞이하면서 착한 목자였던 헴멀레 주교의 묵상과 함께 예수님 강생의 의미를 새겨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네,

말씀이 심장이 되셨네.

하느님께서 심장을 가지셨네,

인간이 된 하느님의 심장이 뛰시네,

수백 만의 사람의 심장이 맥박 안에서.

이제 우리는 알게 되었네 사람의 심장 안에 살고 계신 것이 누구신지.

왜냐하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가장 가까운 곳에 계시는 하느님이 되고 싶으셨으니까.

그분은 단지 사람의 심장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것을 바라지 않으시고,

그 심장과 함께 살고 경험하기를 원하셨으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을 경험하게 된다네.

우리의 심장은 결코 채워지지 않을 헛된 꿈같은 것이 아니며,

출구 없는 벽으로 이끄는 우리 자신의 판단도,

진실을 피해가고자 우리가 끊임없이 내세우는 알리바이도 아닌 것.

우리의 심장은 옳고 힘 있는 것이라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심장을 취하셨으니까.”

- 헴멀레 주교의 1978년 성탄 강론에서

“성탄에 내가 바라는 네 개의 열쇠

하나는 작은 쪽문을 위하여!

주님이 언제, 어디로 오시는지 우리는 모르지. 다만, 그분은 크고 거창한 문을 믿고 있지 않는 이들에게 오시리라.

하나는 안채로 들어가는 문을 위하여!

주님은 내 가장 깊은 곳보다 더 깊은 곳에 계신 분. 그리로부터 주님은 우리의 삶이라는 집으로 들어오신다.

하나는 이웃과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문을 위하여!

나에게 가장 가까이 있으나, 나에게 가장 낯선 이웃, 형제.

주님은 바로 그들로부터 우리의 방문을 두드리신다.

하나는 현관문을 위한 열쇠!

거기에서 사람들은 마리아와 요셉과 함께 있는 예수님께 경배하네.

예수님을 우리 삶에, 우리의 세상에 들어오시도록 맞이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기를.”

- 헴멀레 주교의 성탄 묵상집 「뒷문을 통해 구유로」 중에서

※이번 회를 끝으로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이야기’ 연재를 마칩니다. 그간 수고해 주신 최대환 신부님과 애독해 주신 독자께 감사드립니다.

최대환 신부 (의정부교구 안식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