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46) 클라우스 헴멀레 주교 (2)

최대환 신부 (의정부교구 안식년)
입력일 2016-11-29 수정일 2016-11-30 발행일 2016-12-04 제 3022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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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정권 하에서 성장… 자유의 중요성 깨닫고 강조

대림 시기가 되면 우리는 창조에 대한 위대한 갈망에 대해서, 아울러 이제 다가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인간이 지니는 위대한 갈망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정말 그분을 갈망하기는 하는 것일까요? 혹은 그분에 대하여 거부하거나 자신을 지키기에 급급한 것은 아닐까요?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위기는 오히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절박한 배고픔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는 듯 보이는 데 있지 않을까요? 그럼에도 감히 말하자면, 대림 시기는 마리아 안에서 참되게, 감지할 수 있게 존재합니다. 인간의 내적인 공허, 인간의 상처받음, 인간의 하느님께 대한 갈망이 성모님 안에 모아집니다. 마리아는 빈터를 받아들이시고 기다리시고 준비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 안에 인간 내면 깊은 곳에 있는 갈망이 드러납니다. 그녀 안에서 비로소 인간 내면의 가난함이, 이제 오실 분을 향한 기다림과 준비라는 ‘대림의 태도’(adventliche Haltung)로 승화됩니다. 이제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모님 자신이 ‘살아있는 대림’이셨듯이 자신의 시대에서 살아있는 대림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 클라우스 헴멀레 주교의 대림 묵상

클라우스 헴멀레는 1929년 독일의 아름답고 유서 깊은 가톨릭 대학도시 프라이부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프란츠–발렌틴과 어머니 마리아 사이에서 독자로 태어난 그는 소박하면서도 신앙심 깊은 부모님 사랑을 듬뿍 받고 성장했습니다. 헴멀레의 집안은 예술적인 분위기도 가득했는데요,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는 주로 성당 스테인드글라스나 성상을 제작하는 미술가였고 어머니 쪽 삼촌인 프란츠 요셉 필립은 그 당시 프라이부르크 지역에서 손꼽히는 교회음악가이자 작곡가였습니다. 클라우스는 소년 시절을 나치정권 하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는 그 시절 부모님과 함께 다녀온 스위스 휴가가 매우 인상적인 장면으로 남아있다고 후에 말하기도 했지요.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 신학대학. 출처 위키피디아

프라이부르크가 스위스 및 프랑스 국경 인접 도시이기는 했지만 아주 넉넉한 집안은 아니었기에 스위스 여행은 애써 저축한 돈을 다 들여야 할만한 ‘사치’였습니다. 그러나 이 여행은 그의 부모님들에게는 절박한 것이었다 합니다. 신앙심과 예술적 감수성이 가득한 부모님들에게 나치정권의 정치 선전과 점점 가시화되는 독재 체제는 숨 막히게 느껴졌기에 중립국 스위스에서 조금이나마 자유의 기운을 숨 쉬고 싶었던 것이지요. 소년 헴멀레에게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스위스에서는 너무나 일상적이고 당연하게 행할 수 있었던 나치정권에 대한 비판을 독일로 돌아오는 기차에서부터 입을 봉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대다수 당시 독일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헴멀레 집안도 외국으로 나가 살 수는 없었으므로 스위스에서의 해방감은 잠시의 위안이었을 뿐, 나치정권 붕괴 전까지는 이러한 억압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소년 시절 깨달은 자유의 소중함은 헴멀레의 신학과 사목에 두고두고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우리는 후에 그의 말과 행동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조용하고 온화한 성품이었지만, 남다른 유머감각과 친화력도 지녔던 클라우스 헴멀레는 일찍부터 학문적으로 뛰어난 자질을 보였습니다. 그는 라틴어나 희랍어 교육에 많은 비중을 두는 정통 인문계 김나지움을 마친 후, 1947년 대학 입학 자격인 아비투어를 마치고 프라이부르크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프라이부르크 교구 신학생으로서 프라이부르크 인근 슈바르츠발트(검은숲)에 소재한 교구 신학교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신학교 측에서는 그의 신학교 입학에 부모의 권유나 의지가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판단해서 얼마간 관찰기를 가졌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곧 헴멀레 자신이 분명한 성소를 느끼고 있음이 확인되었지요.

헴멀레는 매우 진지하면서도 행복하게 신학교 시절을 보낸 것으로 보이는데,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영적 지도자였던 루돌프 헤르만 신부였습니다. 헤르만 신부는 깊은 신심을 갖추고 스승으로서 학생들에 대한 진심 어린 애정을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신심운동들에도 개방돼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헤르만 신부의 영적 지도를 통해 헴멀레는 교구 사제로서 살아가는 데 있어, 영성적인 추구를 지속해 나가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며 이를 위해서는 혼자가 아니라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것을 점점 분명히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루돌프 헤르만 신부 자신 역시 이러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었는데, 그에게 당시 큰 영감을 주었던 것이 키아라 루빅(Chiara Lubic·1920~2008) 여사가 창시한 포콜라레(Focolare) 운동이었습니다. 포콜라레의 국제적 모임인 마리아 폴리에 다녀온 후 깊은 감명을 받았던 헤르만 신부는 클라우스 헴멀레에게 확신을 가지고 포콜라레 운동을 권했습니다. 이렇게 포콜라레 영성과 만나게 된 클라우스 헴멀레는 포콜라레와 깊은 유대를 맺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훗날 신학자이자 주교로서 포콜라레 운동을 교회론적 지평 안에서 자리 잡도록 조언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신학교에서 교구 사제로서의 영성과 품성을 수련하는 한편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이라는 학문적 차원을 통해 사제로서, 사상가로서의 능력을 도야했습니다. 이는 매우 큰 행운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당시 프라이부르크대학 신학부에는 매우 뛰어난 교수들이 있었고, 재능 있고 열성적인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프라이부르크대학 신학부에서 신학과 종교철학을 가르치는 교수들 중 존재론적 깊이를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앞으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가시화될 인간학적 관심과 대화와 일치, 소통을 중시하는 신학과 철학을 예비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는 헴멀레 역시 평생을 통해 지키고 발전시켜나간 학문적 방향이었습니다. 헴멀레가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교수들 중에는 구약학자인 알퐁스 다이슬러(Alfons Deissler·1914~2005) 신부, 신약학자인 안톤 푁틀레(Anton Vögtle·1910~1996) 신부가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가톨릭 성서신학의 중요한 선구자들로 존경받고 있고, 우리나라에도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이들을 통해 헴멀레는 특별히 당시 신학에서 중요 주제로 떠오르던 ‘하느님 나라’에 대해 깊이 성찰할 수 있었다고 술회합니다. 그러나 헴멀레에게 가장 중요한 스승이었던 사람은 무엇보다도 종교철학자인 베른하르트 벨테(Bernhard Welte·1906~1983) 신부였습니다. 프라이부르크대학 출신의 세기적인 철학자이자 문제적 인물이었던 마르틴 하이데거의 제자이면서 후에 하이데거의 장례미사를 주례하고 추도사를 했던 그는 중세 철학과 신학, 신비주의에 대한 깊은 인식을 바탕으로 교회가 사상적으로 근대정신 및 현대세계의 철학과 깊은 차원에서 대화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학문만이 아니라 사제로서, 한 인간으로서 많은 존경을 받은 벨테의 문하에서 학자의 길을 걸었던 헴멀레는 학문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실천적 태도에 있어서도 벨테에게 많은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최대환 신부 (의정부교구 안식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