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최민순 신부 (중)

박일 신부(서울 동성고등학교 교장 )rn1981년 사제품을 받고, 서울 반포본당 보좌, 공
입력일 2016-11-22 수정일 2016-11-23 발행일 2016-11-27 제 3021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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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과 교회의 혼란과 아픔 포용하며 성모님께 의탁
4·19혁명 사회상 담은 「피의 승리」 내기도
전 작품서 깊은 영성과 신학적 면모 드러나

8·15 해방은 믿기지 않을 만큼 갑작스레 이뤄졌다. 게다가 6·25 전쟁은 절대적인 궁핍과 도덕의식의 붕괴, 인간 가치의 전락, 사회·정치·경제의 불안과 혼란을 낳았다. 교회는 교회대로 자신의 문제점을 안고서도 한편으로는 삶의 의미를 묻는 백성들에게 하느님을 전하려고 애썼다. 빈민 구호 및 자선 활동, 의료 및 사회복지 사업 등을 활발히 전개한 덕분에 ‘밀가루 신자’들도 많았지만, 교세 또한 급성장했다. 최민순 신부는 이러한 모든 면을 마음 깊이 담았고, 고뇌했고,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으로 참여하고 경계하고 일깨웠다.

최 신부는 6·25 전쟁 중 1951년 대구대교구 출판부장, ‘대구매일’(현 매일신문) 주간, ‘천주교회보’(현 가톨릭신문)의 사장으로 임명됐다. 그 후 ‘대구매일신문’으로 제호를 바꾼 신문에 수필을 싣고, 신설된 문화란에 글을 쓰고, 구상 시인과 함께 논설도 맡아서 써왔다. 특히 ‘천주교회보’의 명칭을 ‘가톨릭시보’로 변경하고, 출판기관 운영이 어렵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신문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이를 위해 사설은 물론 호교론과 신심에 관한 글, 시 등의 원고를 ‘오랑캐꽃’, ‘우당’, ‘약망’, ‘요왕’, ‘돌샘’, ‘산문혈’ 등의 필명으로 써냈다. 하지만 경영에 관한 업무는 모두 실무자에게 일임했으며, 서울 수복 후에는 서울 대신학교(현 가톨릭대 성신교정)로 복귀해 원고만 보냈다. 1953년부터는 부사장인 김수환 신부(고(故) 김수환 추기경)에게 원고만 보내다가, 1956년에 사장직에서 사퇴했다. 이어 최 신부는 신비신학 연구를 위해 스페인으로 떠났다.

# 1945~1960년 저작활동

8·15 해방과 6·25 전쟁, 그리고 이어지는 분단 상황 속에서 벌어진 독재 정권의 전횡과 그에 저항한 4·19 혁명 등은 우리 민족과 교회, 최 신부에게 참혹한 역정이었다. 이러한 역정은 과거 일제 치하에서의 체험과 함께 최 신부의 삶과 정신 모든 면에 큰 자국을 남겼고, 사제요 교수로서의 자의식과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최 신부는 이러한 민족과 교회의 혼란과 아픔을 자기 자신의 혼란과 아픔으로 포용하면서, 늘 그래왔던 것처럼 겸손되이 성모님께 의탁했다. 특히 이 상처들의 회복을 위한 한탄과 몸부림, 치유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찾는 모색의 열매들을 홀로 소유하지 않고 갖가지 작품 활동으로 표출해 모두에게 선사했다.

최 신부의 다양한 작품들 중 유고집 「영원에의 길」에 실린 작품들 중, 연대가 알려진 것들 위주로 분류해 몇 가지를 정리해본다.

시 부문에서는 「때는 왔나 봅니다」(1949), 「만도」(1956), 「매괴꽃」(1956) 등을 비롯해, 4·19혁명 당시 많은 청년들이 흘린 피를 서러움과 기쁨의 눈물로 받아들일 고마움으로 표현한 「피의 승리」(1960) 등이 있다. 또한 시집 「님」(1955, 성바오로출판사)과 수기(手記) 「밤의 일기」(1951), 논설 「신문화의 태동과 국민적 자각」(1951) 외 6편 등도 냈다. 호교론으로서는 현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겸손되이 무릎 꿇고 이성의 머리를 숙여 성모께 겸손된 기도를 드릴 뿐이라고 외치며, 당면한 전란 중에 구원을 전구해 주시기를 당부한 「루르드 성모 발현의 의의」(1951), 「선열과 문학운동」(1912), 「가톨릭 신앙의 서곡」(1951)」 외 10편을 꼽을 수 있다.

수필은 「부활전야」(1951), 「낙동강」(1954), 「겨자씨」(1956) 외 25편이, 문학론으로는 「J씨에게」(1952) 등이 실려 있다. 또한 「영원에의 길」에 실리지 않은 강론과 강의록도 다수가 있다. 번역서로는 단테의 「신곡」 중 「지옥 편」(1957)을 냈다. 이 밖에도 최 신부는 많은 강의와 강론, 수필, 단상, 시조, 성가, 축가, 교가, 수도회가 등을 쓰면서 열정적으로 저작 활동을 했다.

서울 혜화동 가톨릭대 신학대학 교내 낙산마루 산책로에 세워진 최민순 신부 시비. 그의 영성이 잘 드러난다는 평을 받고 있는 시 ‘두메꽃’이 새겨져 있다. 시비 뒤편으로는 신학대와 맞닿아 자리하고 있는 서울 성곽이 보인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1960~1975년 저작활동

이 시기, 최 신부의 글은 가르멜 영성에 기초해,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과 함께 걸으면서 생명의 원천인 하느님을 추구하고 찬미 드리는 것으로 귀착된다. 이는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자신이 먼저 진정한 길을 걸으며 세상을 향해 외치는, 인생살이의 서러움을 뼛속까지 체험한 형제로서의 간절한 부름이요, 성인들에 대한 연구와 기도 및 수덕생활로 보낸 지혜 가득한 학자요 선생으로서의 손짓이며,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징표를 발견한 예언자로서의 실존이며, 봉헌과 희생의 제사를 지내는 사제로서의 자기희생이요, 자신의 피로 맡겨진 양 떼를 키우는 사목이었다. 이러한 그의 내면은 수필과 시, 그리스도교 및 일반 고전 번역, 강론, 피정 지도, 강의, 성가 및 수도회가 작사 등 모든 면을 통해 드러난다.

시집으로는 「밤」(1963), 번역서 「신곡」(1960), 「고백록」(1965), 「완덕의 길」(1967), 「성경의 시편」(1968), 「영혼의 성」(1970), 「돈키호테」(1969), 「깔멜의 산길」(1971)을 펴냈다. 이 외에도 기행문 「구름과 같이」(1964), 명상 「믿는 사람들」(1974), 수필 「천국으로 띄우는 글월–찬미 예수 마리아 요셉」, 영성신학 국제 심포지엄 발표논문인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성」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을 풍성하게 내놓았다. 또한 가톨릭대학이 펴낸 최 신부의 「강의록」을 보면, 그의 영성신학적 이해의 깊이와 폭이 얼마나 깊고 넓게 잘 정돈돼 있는지 알 수 있다. 이 강의록은 독창적인 구성을 통해, 최 신부의 고유한 관점도 잘 드러낸다.

아울러 수필 「무릇 자기에게 돌아가」, 「성 금요일」을 비롯해 「사순절 강론」(1974, 명동성당) 등은 그의 깊은 영성적, 신학적 면모를 드러낸다. 특히 최 신부 최후의 시 「받으시옵소서」는 한 인간으로서, 사제로서, 자신의 전 생애를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과 가르멜 영성의 본질에 조명하면서, 자신의 전 존재를 기울여 하느님과의 일치를 희구한 그의 영성과 하느님 이해의 절정을 드러낸다.

박일 신부(서울 동성고등학교 교장 )rn1981년 사제품을 받고, 서울 반포본당 보좌,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