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최민순 신부 (상)

박일 신부(서울 동성고등학교 교장 )rn1981년 사제품을 받고, 서울 반포본당 보좌, 공
입력일 2016-11-15 수정일 2016-11-16 발행일 2016-11-20 제 3020호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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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작품에 ‘우리 것’에 대한 연민과 애정 담아
신학생 시절부터 글재주 뛰어났고 사색 즐겨
일제하 해성학교 운영하며 민족정신 고취

최민순 신부

“최민순 신부가 한국교회에 남긴 의미는 그 깊이와 폭에 있어서 측량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특히 영성과 문학에 있어서 그의 위상은 참으로 선구자적이고 우뚝해, 차라리 고독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에게 연구를 통해 다가가 조금이나마 배우겠다는 마음, 기리겠다는 마음으로 이 작업을 시작하려 한다.”

박일 신부(영성신학자·서울 동성고등학교 교장)는 최민순 신부의 생애를 조망한 논문 「최민순 신부의 생애와 하느님 이해」 서론에서 이같이 밝혔다. 박 신부는 지난 2005년 설립 150주년을 맞이한 서울 대신학교 학술 축제에서 최민순 신부에 관한 연구와 나눔을 신학교 역사에 비춰 조명하기에 앞서, 이 논문을 내놓았다.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이번 호 주인공은 고(故) 최민순 신부(1912∼1975)다. 그의 문학적 면면을 들여다보는 글은 영성신학자로서 그의 삶과 작품들에 관해 연구한 박일 신부의 논문에서 발췌, 정리해 싣는다. 현재까지도 한국교회 내에서 최 신부에 관한 연구는 매우 미미한 게 현실이다. 이 논문은 최 신부에 관한 대표적인 연구 자료로 꼽힌다.

최민순 신부의 삶을 관통하는 주제는 바로 그가 체험한 삶의 부조리에 대한 해답으로써의 하느님과 그분과의 일치를 향한 여정이라고 본다. 따라서 이러한 주제들을 그의 작품들, 그중에서도 특히 시(詩)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시야말로 시인의 삶과 내면을 있는 그대로 나타낸다고 보기 때문이다.

최민순 신부는 1912년 10월 3일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면 군하리에서 신앙심 깊고 인격적으로 성숙한 부모 슬하에서 출생했다. 그는 열두 살 때 신학교에 가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가족들과 주변의 반대와 걱정은 물론 비웃음 또한 매우 심했다고 한다. 그가 다니던 학교 선생님은 동양 도덕을 무시하는 나쁜 학교에 간다면서 꾸짖고, 학생들에게 그와 관계를 끊으라는 파문 선고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신심 깊은 아버지의 후원과 당시 진안 어은동본당 이상화 본당신부의 허락에 힘입어, 1923년 대구 성유스티노신학교 라틴어과에 입학했다. 이어 철학과와 신학과를 졸업하고, 1935년 6월 15일 사제품을 받았다.

최민순 신부 시집 ‘님’ 1955년 경향신문사 초판.

최 신부는 신학생 시절부터 이미 문재(文才)에 뛰어났으며, 사색을 즐겨했고, 우수한 성적을 보였다.

그는 서품 바로 다음날부터 수류본당 주임으로 성무를 수행했다. 이어 전주본당 보좌를 거쳐 1938년 전주 해성심상소학교 교장에 임명됐다. 특히 이 시기는 해성학교 운영을 통해 신앙과 민족정신을 함양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점철된 젊음의 활력이 불붙던 때였다고 볼 수 있다.

일제의 탄압이 갈수록 거세지던 때, 당시 제도권 교회는 친일 노선을 걷고 있었다. 박해의 구실을 줄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참혹한 가난 등은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일이 불가능할 만큼 정신적 겨를이 없게 했다. 신사 참배 강요에 대해서는 분명한 거부 입장을 보이던 교회도 1935년에는 주일 교황 사절 마렐라 대주교가 참가한 가운데 평양교구에서 열린 ‘한국 천주교 교구장 연례 회의’에서 신사 참배 허용을 결정하고야 만다. 그러나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교회 지도자들의 우려 속에서도, 한국인 성직자들은 일제 강도로부터 육신은 죽임을 당하고 있을지언정 정신만은 죽지 않겠다는 결의에 차 있었다. 특히 한국교회는 1925년 79위 시복 이후 순교성지를 조성하는 등 순교 정신 현양에 힘써왔다. 또 순교 정신을 강화하고 현양 사업을 조직적이고도 효과적으로 지속하기 위해 ‘한국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를 창립했다. 전주교구 김양홍 교구장의 권고에 따라 최민순 신부도 이 현양회에 입회해 적극 활동했다.

이 활동에는 일제에 대한 저항 정신 고취라는 숨은 뜻이 있었다. 그 활동 가운데에는 민족 문화 수호 운동의 하나로 어린이 대상 한글 교육 등 한글 보급 운동을 전개하고, 성체 거동과 대축일 행렬 등을 통해 민족의 정기를 살리면서 저항 의지를 격려하는 기회 등이 포함돼 있었다. 집회의 자유가 없던 시절, 최민순 신부도 이러한 대열에 적극 동참했다. 이렇게 신부와 신자들이 일제의 탄압에 맞서 강론 등을 통해 혹은 행정 명령 등을 거부함으로써 저항하고, 이로 인해 투옥당하고 각종 고초를 겪기도 했다. 최민순 신부도 일본 경찰에 의해 구속되기도 했다.

그 후 1945년 3월 30일 최 신부는 모교인 대구 성유스티노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했으나, 일제에 의한 폐교 조치로 같은 해 4월 17일 사퇴하게 된다. 이어 경성천주공교신학교 교수와 부학장, 도서과장 등을 역임했다.

최 신부는 글재주가 뛰어나고 사색을 즐기는 터라 아마 많은 작품을 썼을 것으로 짐작된다. 발표하지 않은 작품들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 6·25 전쟁을 겪으면서 잃어버리거나 다른 이유로 접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가톨릭 청년」에 발표돼 그의 유고집 「영원에의 길」에 실린 작품들 중 저술 연대가 표기된 것들만 소개해보고자 한다.

대표적인 작품은 프랑소와 모리악을 소개하는 문학론인 ‘프랑소아 모리악의 소설론’(1936. 5)이 있다. 또 최 신부가 수류본당 주임 시절 공소를 방문하면서 쓴 수기(手記)인 「양 떼를 찾아」(1936. 6)를 비롯해 단편 소설로「효종」(11936. 6)과 「헌 양말」(1936. 11)이 있다. 「효종」은 극도의 가난에 몰려 죽음의 유혹을 받았던 두 모녀가 삼종 소리에 이끌려 정신을 차리고 새 삶을 찾는다는 줄거리의 소설이다. 또 「헌 양말」은 우리나라 공소의 가난한 교우들의 삶과 신심 깊은 삶을 그린 작품이다. 각 작품들에서는 최 신부 특유의 서정성과 감수성, 이른바 ‘우리 것’에 대한 연민과 끊임없는 애정 등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이후 모든 작품 속에서 묻어난다.

박일 신부(서울 동성고등학교 교장 )rn1981년 사제품을 받고, 서울 반포본당 보좌,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