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이야기] (40) J.R.R. 톨킨 (2)

최대환 신부 (의정부교구 안식년)
입력일 2016-10-18 수정일 2016-10-18 발행일 2016-10-23 제 3016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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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에게서 라틴어 배우며 언어의 매력에 젖어

영화 ‘반지의 제왕’ 시리즈 ‘반지원정대’ 한 장면.

황금이라고 해서 모두 반짝이는 것은 아니며,

방랑자라고 해서 모두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속이 강한 사람은 늙어도 쇠하지 않으며,

깊은 뿌리는 서리의 해를 입지 않는다.

잿더미 속에서 불씨가 살아날 것이며,

어둠 속에서 빛이 새어 나올 것이다.

부러진 칼날이 다시 버려질 것이며,

잃어버린 왕관은 다시 찾을 것이다.

- 아라곤느의 노래(「반지의 제왕」 I.I.10 )

■ 톨킨의 어린 시절과 가톨릭 신앙 안에서의 성장

작가들에게 있어 어린 시절 체험이 그들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을 자주 보게 되는데요, 그것은 톨킨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라 하겠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를 잃은 톨킨은 십 대 때 삶의 지주였던 사랑하는 어머니를 역시 잃어야 했고, 후견인이었던 덕망 있고 학식 있었던 가톨릭 사제 프랜시스 신부의 후원에 힘입어 절망의 시절을 버텨내고 학문의 길로 입신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톨킨의 어린 시절과 성장기는 그의 작품과 인생관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문학비평가이고 저술가이자 20세기의 그리스도교 문인들에 대한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조지프 피어스는 그의 저서 「톨킨: 인간과 신화」(김근주, 이봉진 역, 자음과 모음, 2001)에서 비교적 소상하고 세심하게 그의 어린 시절과 성장기에 대해 전해주고 있습니다. 「반지의 제왕」의 내용과 주제를 본격적으로 보기에 앞서 조지프 피어스 책에 나오는 서술을 중심으로 톨킨의 어린 시절과 성장기를 살펴보면서 「반지의 제왕」 곳곳에 나타나는 이별의 슬픔에 대한 깊은 공감, 그럼에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절망 대신 믿음을 통해 위안과 희망을 얻은 그리스도교적 인생관이 그의 삶의 체험과 무관치 않다는 것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톨킨은 1892년 1월 3일 아버지 아서 톨킨과 어머니 메이블 톨킨 사이에서 남아프리카의 블루폰테인에서 출생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블루폰테인 은행 지점장으로 일했었기 때문이었죠. 그는 대부분의 영국인이 그러하듯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남아프리카는 톨킨의 삶에서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진 못합니다. 그의 어머니가 톨킨이 겨우 세 돌이 지났을 때 그와 남동생 힐러리를 데리고 영국으로 귀국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버지 역시 몇 달 후 귀국하려 했는데, 병에 걸려 귀국은 연기되었고 갑작스럽게 병세가 악화돼 안타깝게도 결국 남아프리카 블루폰테인에서 병사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이제 남편 없이 넉넉하지 않은 재정적 상태에서 홀로 어린 두 형제를 키워야 하는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된 것이지요.

■ 시골마을에서의 삶 작품 곳곳서 드러나

그녀는 생활비 때문에 저렴한 집을 찾아야 했고, 그래서 버밍엄의 시골마을 세어홀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골에서의 삶이 톨킨에게 매우 큰 영향을 미칩니다.

「반지의 제왕」을 보면 호빗들이 사는 세이어 마을의 전원적인 풍경과 삶, 그리고 숲을 파괴하고 착취하는 암흑의 세력을 응징하는 숲의 정령에 대한 인상적인 장면들을 만나게 되는데, 아마도 이런 생생한 묘사와 상상력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어린 시절에 체험한 넉넉하지는 않지만 자연과 가까웠던 전원적 환경과 그 안에서 나무와 숲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가졌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어린 시절 톨킨과 동생의 선생님은 다름 아닌 어머니 메이블이었습니다. 학교 수업료를 낼 여력이 되지 않아 직접 가르쳐야 했던 것이죠. 메이블은 외국어에 대한 조예와 음악, 미술적 재능도 가진 여인이어서, 충분히 어린 두 아들에게 좋은 가르침을 줄 수 있었습니다. 톨킨은 특히 어머니에게 라틴어를 배우면서 언어에 대한 자신의 재능과 사랑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언어의 역사, 의미, 소리, 철자의 모양 등 언어의 모든 면에 매혹되고 영감을 얻으며 상상력을 이끌어내는 톨킨의 문학세계는 이미 어린 시절에 시작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 시절 신화 이야기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톨킨에게 있었던 매우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어머니가 가톨릭 신앙으로 개종하였고, 그래서 톨킨 역시 8살 나이에 로마 가톨릭교회의 품에 들어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남편을 잃은 후 그리스도교 신앙에 깊이 의지하고, 영국 성공회에서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는데, 어느 날 길을 잘못 들어 버밍엄 빈민가에 있는 가톨릭 성당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가톨릭교회에 대한 사랑이 시작되었고, 마침내 여동생과 함께 교리를 배우고 가톨릭교회의 신자가 됩니다.

가톨릭교회로의 입교는 그녀에게 매우 중요한 삶의 전환점이 되고, 한편으론 인생의 시련과 고통의 시작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친정 가족들은 이런 결정에 매우 분개하였고, 여러 가지로 그녀를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갖가지 정신적인 압력뿐만 아니라 일체의 재정적 지원과 도움을 끊어버립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신앙과 결심을 굳건히 지켰고, 자식들이 가톨릭 신앙 안에서 자라나도록 애를 씁니다. 톨킨의 가족은 톨킨이 상급학교에 지원, 합격하였을 때, 사랑하던 시골의 집을 떠나 산업화로 복잡하고 부산스러웠던 대도시 버밍엄으로 이주해야 했습니다. 매일매일, 등교하기 위한 교통비를 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죠. 싼 집세의 집을 찾아 여러 번 이사해야 했던 가족이 정착한 곳은 에드베이스턴에 있는 허름한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곳 근처에는 복자 존 헨리 뉴먼이 세운 오라토리오회의 수도원이 있었고, 이곳에 있는 신부 프랜시스 자비에르 모건 신부를 알게 됐습니다. 이는 톨킨 가족에게 매우 큰 행운이었습니다.

■ 어머니, 집안 반대에도 가톨릭 신앙 지켜

생활고와 집안에서 고립되고 냉대받는 마음의 고통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며 자녀들을 키우던 메이블 톨킨은 점점 지병인 당뇨병이 심해졌습니다. 프랜시스 신부 도움으로 잠시 시골집에서 요양할 기회를 얻기도 했지만 결국 1904년 11월 초 혼수상태에 빠졌고, 며칠 후 불과 서른네 살의 나이로 숨을 거둡니다. 그녀는 브롬즈그로브에 있는 가톨릭교회 묘지에 영면하였고, 유언장에서 프랜시스 신부를 후견인으로 부탁하였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깊은 사랑과 존경을 지니고 있었으며,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평생 가톨릭 신앙에 충실하게 머물렀던 톨킨은 어머니의 죽음을 일종의 신앙을 위한 ‘순교’로 이해했고, 평생 어머니의 신앙으로 자신이 신앙을 지킬 힘을 얻게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톨킨은 자신의 만년에 한 편지에서 여전히 가득한 그리움과 슬픔과 감사의 마음으로 이렇게 술회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죽음… 자신의 신앙을 어린 두 아들에게 전해 주려다가 박해와 가난에 지쳐서 결국에는 병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레드날의 우체부 집에서 요양하셨을 때, 우리 세 식구가 함께 지냈던 작은방이 기억난다. 어머니는 그 작은방에서 의식이 없어 성체성사도 받지 못하시고 외롭게 돌아가셨다. 내 아이들이 옳지 않은 길로 빠질 때마다, 난 너무나 슬프고 마음이 아프다.”(조지프 피어스, 「톨킨: 인간과 신화」, 37~38쪽, 재인용)

최대환 신부 (의정부교구 안식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