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반예문 신부 (상)

함제도 신부(메리놀회 한국지부장)
입력일 2016-10-18 수정일 2016-10-24 발행일 2016-10-23 제 3016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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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접목한 대중문화… 매스컴 활용해 알린 사제
대중가요 영어로 번역 음반 내
본당 사목하며 매스컴 중요성 인식
반예문 신부(1927~2015).
1973년 제1회 대한민국방송가요대상 여자가수부문상을 수상했었던 가수 김상희씨가 불러 더욱 잘 알려진 곡으로 어린이 성가집에도 실렸었다. 반예문 신부(메리놀외방선교회, Raymond F. Sullivan, 1927~2015)는 “어른 중엔 나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고, 돈밖에 모르니 어른이 되기 싫다”는 어린이들의 설문조사 결과를 보고, 어린이들의 꿈과 소망을 담은 노래를 작사·작곡했다. 노랫말이 어린이를 위해 지은 동요 같지만, 사실 처음엔 어른들에게 띄우는 노래로 만들었다고 했다. 오염되지 않은 곳에서 살고 싶어 하는 어린이들의 소망을 어른들에게 노래로 전해주려 한 것이었다.

반예문 신부는 장애인 교육사업과 다양한 사회봉사 사업 등에 헌신했던 선교사제였다. 또한 그는 가톨릭매스컴 분야에서 두드러지는 활동 모습을 보이며 투신했었다. 대중가요를 작사·작곡한 보기 드문 이력을 갖고 있었고, 한국의 유명 대중가요를 영어로 번역해 음반도 냈다. 틈틈이 지은 노래들을 모아 만든 음반의 수익금은 ‘사랑의 보청기 보내기 운동’을 비롯해 장애인들의 재활을 위해 썼다.

그가 작사·작곡해 가수 이광조씨가 부른 노래 ‘한국의 마돈나’는 1978년 MBC 서울국제가요제에서 선보이기도 했다. 동지섣달 피난길에 한 어머니가 길가에서 얼어 죽었는데, 자신의 옷을 모두 벗어 갓난아기를 꼭 감싸 품고 있어 아기만 살았다는 실화를 배경으로 한 노래였다. 그 아기는 선교사가 키웠고, 12살이 되었을 때 엄마의 희생적인 사랑 이야기를 전해들은 아이는 꽃을 한 아름 안고 엄마의 묘지를 찾아가 한없이 울었다는 이야기가 영문 잡지에 실린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아 만들었다. 가수 최희준씨가 부른 ‘아버지’라는 노래는 가정을 다복하게 이끌어주신 아버지를 떠올리며 지은 노래였다. 또 그가 작사·작곡에 나선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Christ, Our Peace)는 1989년 서울에서 열린 제44차 세계성체대회 영어 테마송으로 불렸다. 이러한 활동 덕분에 반예문 신부는 교회 안에서는 물론 일반 사회에서도 ‘가요 신부’, ‘노래하는 신부’ 등으로 잘 알려지기도 했다. 특히 그는 ‘가톨릭 가요 대상’을 제정하는 등 가톨릭과 대중문화의 접목을 시도하면서 건전한 문화 향상에 큰 힘을 기울인 사제였다.

■ 하버드 졸업 후 메리놀회 입회

반예문 신부는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하버드대 수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좋은 나라, 좋은 도시, 좋은 가정에서 태어났고, 좋은 부모,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된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이라면서 감사했다. 그리고 자신이 받은 은총을 나누면서 가난한 나라에서 봉사하기 위해 메리놀회에 입회했다. 구체적으로 사제가 되고자 결심한 것은 대학시절이었지만 이미 어린 시절부터 가톨릭계 학교에서 수학하면서 수도자들의 좋은 표양을 마음 깊이 새겨왔었다고 했다. 고등학생 시절 성소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하느님을 위해 일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이어서 젊은 사람들은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는 미래에 무엇을 하겠다는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었다. 반 신부는 잘 아는 수도자, 사제들과 상의를 하고 고민하다 메리놀회 입회를 결심했다고 했다.

그는 미국 메리놀 신학대학을 졸업한 후 1954년 사제품을 받았다. 당시 동창 사제가 모두 40명이었는데, 각각 남미와 아프리카, 아시아 중에서는 일본, 대만, 필리핀, 한국에 파견됐다. 당시 한국에는 반 신부를 포함해 4명의 사제가 파견됐다.

2004년 금경축을 맞은 반예문 신부가 청주 내덕동 주교좌 성당에서 안젤루스 도미니 단원들과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

반 신부는 이듬해 한국에 들어와 충주 아현(현 교현동)본당 보좌, 보은·청주 북문로(현 서운동)·청주 내덕동본당 주임으로 사목을 했다. 동시에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과 장애인들을 위한 재활시설 등의 운영에도 헌신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자기 나라가 아닌 외국에 가서 사는 것은 쉬운 일만은 아니다. 걱정거리 중에는 그 나라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것도 포함돼 있다. 반예문 신부도 처음엔 그런 마음을 안고 한국에 들어왔지만, 청주교구에서 사목을 하면서 신자들이 ‘우리 신부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공동체 안에 자신을 받아들였다는 생각에 더욱 기뻐했다고 했다. 가끔 말도 잘 못하고 풍속 등도 모르는 게 많았지만 신자들은 그 자체로 인정해주고 따뜻하게 감싸 안아줬다는 것이다. 특히 반 신부는 청주교구에서 사목활동을 하면서 당시 라디오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를 유심히 살폈다. 전깃불조차 없던 마을 전체에 동네 스피커를 통해 들을 수 있는 음악이나 정보 등은 주민들의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반 신부는 라디오는 홍보, 계몽, 선도 등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 착안해 매스컴의 중요성을 다시금 인식하게 됐다. 그래서 반 신부는 당시 지부장 사제와 의논해 본당 사목을 그만두고 1971년 초부터 서울에 와서 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됐다. 아울러 반 신부는 외국의 매스컴 활동 관계자들과도 활발히 교류하면서, 본인부터 좀 더 깊이 있게 공부해야겠다는 필요성을 절감하고 1975~1977에는 미국으로 유학해 커뮤니케이션 석사 학위도 받았다. 보다 전문적인 역량을 갖추고 구체적인 활동에 나서기 위한 노력의 하나였다.

함제도 신부(메리놀회 한국지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