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이야기] (38) 닥 함마슐트 (하)

최대환 신부 (의정부교구 안식년)
입력일 2016-10-04 수정일 2016-10-05 발행일 2016-10-09 제 3014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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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치 중심에서도 겸손한 언행으로 주목받아

1961년 닥 함마슐트 장례. 출처 위키미디어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하느님께서(Icke jag utan gud i mig)”

- 스웨덴 웁살라 닥 함마슐트 묘소에 적혀 있는 묘비명

■ 인간 닥 함마슐트와 세계 평화를 위한 마지막 헌신

닥 함마슐트(1905~1961년)는 1961년 9월 12일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두 번째 임기를 보내며, 내전을 피하게 하는 길을 찾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콩고의 분쟁지역 방문길에 올랐고,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이 암살로 간주하고 있는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닥 함마슐트는 스웨덴의 웁살라 대학에서 철학, 경제학 그리고 법학을 전공하고 석사와 박사학위를 준비하던 시절에 이미 뛰어난 지적능력과 함께, 관료로서의 행정적 능력도 널리 인정받으며 첫 출발을 했습니다. 사회민주주의에 깊이 영향을 받은 자신의 학문적 확신을 현실적인 경제, 정치적 상황에서 현명하게 구현해가는 관료로서의 자질을 일찍부터 체득했다 할 수 있겠지요.

그는 우선 경제 분야에 있어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40대 초반에 이미 재무장관, 스웨덴 중앙은행 총재 등의 중책을 역임했습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그는 자신의 관심사와 활동영역을 경제분야와 함께 국제 외교분야로도 확장해서 외교부 차관과 장관서리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53년 7월, 스스로 사퇴한 전임 총장 노르웨이의 리에에 이어 제2대 유엔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친절하고 세련되며 조용한 외교관으로 보여진 그를 강대국 대표들은 손쉬운 상대자로 생각해 선택했지만 그는 예상을 깨고 전후의 복잡하고 첨예한 국제 질서 속에서 정의와 평화를 통한 국제질서 수립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언어적, 외교적, 행정적 탁월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아울러 유엔 평화유지군을 설립하는 등 유엔의 위상을 확고히 하고 강대국들의 일방적 이익추구를 견제했던 모습에서 역사가들은 그를 가장 위대한 유엔 사무총장으로 평가합니다.

화려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관료로서의 경력을 쌓아갔고 그에 걸맞은 업무능력과 현명함을 갖춘 그였지만, 우리가 고급 관료들에게서 자주 보게 되는 그저 성공에 눈이 먼 기회주의적이고 출세지향적인 경향이나 자기도취와 오만함에 사로잡힌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는 공인으로서 공적으로 자신이 끊임없이 드러나며 책임지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감수하며, 사심 없이 다른 이들에게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이 인생의 사명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의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인생의 소명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운명처럼 우리를 찾아오는 것이며, 참된 인생의 행로는 우리를 ‘선택’하는 것이기에 우리의 몫은 용기를 가지고 끝까지 그러한 소명에 응답하고, 그러한 길을 걷는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를 만나는 사람들은 그에게서 언제나 쾌활하고 편안하며 친밀한 인상을 받았지만, 사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내면에 있는 숙고에서 우러난 진지함과 끊임없이 도야해온 자기 절제로부터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닥 함마슐트에게 두드러졌던 것은 겸허함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사명감과 소명의식이 독선과 우월감이 아니라 하느님과 사람들을 향한 겸손한 봉사와 환대로 열매 맺을 수 있었겠지요. 그가 겸허함을 매우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고 그에 대해 사색하고 체화하려 노력한 흔적은 유고집에 자주 보여지는데요, 그는 나무들 앞에 핀 작은 꽃들 앞에서 보이는 우리의 겸손함이, 저 높은 정상에 오르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준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세상에 배울 것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으며, 만물과 만사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 앞에서 모든 이는 언제나 막 배우기 시작하는 초심자에 불과하다고 일기에 적어두었습니다.

닥 함마슐트가 숨 가쁘게 화려한 경력을 쌓아가는 가운데, 수없이 많은 업무와 만남 속에서, 또한 언론과 사람들의 주목과 갈채, 관심 속에서도 공감력과 개방성, 겸허함과 소박함 같은 인격적 덕목과 매력을 잃지 않았던 것은 그가 매일 자기 자신의 성찰을 일상의 중심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 “직위에 따른 권능을 사용할 자격은 오직 매일매일 그 직위에 부합하는 정당성을 가지고자 애쓰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라고 쓰기도 했지요. 한 나라의 경제 정책을 좌지우지했고, 국제 정치의 중심에 있었던 이 저명한 정치가이자 외교관이 이토록 깊은 정신적 내면을 도야하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감정과 타인과 세상에 대해 정서적, 문학적으로 탁월한 감수성을 지녔다는 것은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일기들이 유고집 형태로 공개되면서 비로소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그에게 일기는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 체계적으로 ‘저술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다그치고 또한 위로하고 고무하는 자리였습니다. 그가 죽은 후 책장에서는 마치 메모처럼 수많은 쪽지에 적혀있는 그의 일기들이 여러 사진들과 함께 발견되었고 그를 아끼는 이들이 연대순으로 정리하여 출판하였습니다. 그의 일기를 보면서 스토아 학파 철학자이자 황제로서 로마 시대 칠현제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떠올리게도 됩니다. 황제의 권좌가 아니라 인생의 참 진리를 깨닫고 실천하는 철학자의 삶을 더 사랑했던 그는 매일의 격무와 전쟁터에서의 격전을 뒤로하고 매일 밤, 자신의 막사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 가르치는 자성과 성찰의 글을 썼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죽은 후 이를 모아 후세 사람들은 ‘명상록’이라는 이름으로 불렀고 이는 오늘날에도 ‘삶의 기예’로서의 철학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큰 감동과 영감과 가르침을 주는 불멸의 고전으로 남아있습니다.

닥 함마슐트의 일기는 고대의 현자가 그러하였듯,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의 글이지만, 한편으로는 ‘명상록’과는 또 다르게 오늘의 독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측면들이 있다 싶습니다. 먼저 그의 글은 비록 자기 자신을 위해 쓰여진 글이지만, 묘하게 읽는 이에게 말을 건네는 느낌을 주는데요, 이는 그가 완전함을 추구하는 철학자가 되길 원했던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함께 더 정의롭고 좋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꿈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가 숨졌을 때 소지한 서류가방에는 유다인 철학자이자 사상가인 마르틴 부버의 그 유명한 저서인 「나와 너」를 번역 작업하던 노트가 함께 있었다고 하는데요, 평생을 독신으로 산 닥 함마슐트가 평생 중요하게 생각한 가치가 다름 아닌 인격적 관계였음을 엿보게 합니다. 그리고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세계 평화를 위해 진력한 사람답게 그의 삶과 글에 나타난 평화를 위해 애쓰는 이의 노고와 고민, 기쁨과 행복은 우리를 감동하게 하고 영감을 줍니다. 또 그의 글은 무엇보다 철학적, 정신적 탐구와 성찰을 넘어서는 절대자에 대한 깊은 신뢰가 삶의 중심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닥 함마슐트의 삶과 글은 그러기에 올바른 삶과 영성의 길을 찾는 신앙인들에게 실천적 투신과 영성적 체험이 결코 다른 원천을 지닌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쳐주는 소중한 유산이라 하겠습니다.

최대환 신부 (의정부교구 안식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