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정지용 시인 (중)

구중서 (문학평론가)rn1960년대부터 문학평론 활동을 계속해왔다. 서울대교구 가톨릭출판사
입력일 2016-10-04 수정일 2016-10-10 발행일 2016-10-09 제 3014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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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 정지용, 절제·함축된 언어로 ‘믿음’ 드러낸 작품 발표
「가톨릭청년」 편집위원…  당시문화 종합
해외유학 영향으로 감각적 시어 강조
전통과 새로움 존중하는 문학관 지녀

충북 옥천에 있는 정지용 생가.

■ 일제치하 「가톨릭청년」의 역할

정지용은 휘문고보 학생 시절에 ‘요람’이라는 동인에 가담해 활동했고 문예반의 반장으로서 교지 「휘문」의 편집에 참여했다. 1919년 3·1 만세 운동 때엔 휘문고보 주동 2명 중 1명으로서 정학을 당했다.

일본 도시샤대학 유학 시절에는 교토 지역 조선인 가톨릭신우회 서기였고,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후에는 서울 명동본당 청년회 총무를 거쳐 회장이 되었다. 정지용의 성품이 꾸준하고 부지런해 늘 어느 공동체에서든 살림꾼 역할을 맡아왔다.

월간 「가톨릭청년」 잡지의 편집위원이었지만 정지용은 문단의 유력한 시인 작가들을 필진으로 포섭하는 데서도 「가톨릭청년」의 편집장 역할을 하는 격이었다.

당시 가톨릭교회가 일반사회 문화계에 활발히 진출하는 데 대해 문단의 한쪽 사회주의 경향 계열에서는 비판의 여론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때 가톨릭 쪽에서 정지용 시인이 대변인격으로 나서서 대응하는 논리를 폈다.

“「가톨릭청년」지가 문예전문지가 아니요 개인 중심의 잡지가 아니다. 다만 건전한 문화의 적극적 옹호자인 가톨릭교회는 문학인의 좋은 요람이 되어 줄 뿐이요 가톨릭의 2천 년간 교양의 원천에서 출발하였다.”(‘한 개의 반박’, 조선일보 1933. 8. 26.)

과연 「가톨릭청년」은 문예 전문지가 아니고 종합 지성지였다.

“가톨릭은 자본주의와 협력하지도 않고 공산주의와 결탁한 바도 아니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는 1천여 명의 가톨릭 신부가 투옥되었다. 사회정의를 지향한다. 가톨릭교회가 인간 사회의 행복을 위해 공헌을 하지 않는다면 교회의 사멸을 의미한다는 레오 13세의 말씀을 준봉하여 우리는 민중의 생활투쟁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가톨릭청년」 1934. 11.)

이러한 제목과 논지의 잡지 글들을 편집하면서 정지용 시인은 “가톨릭 2000년간 교양의 원천”으로 사회의 건전한 문화에 공헌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아울러 정지용 시인은 시를 쓰는 그의 본업에도 계속 충실했다.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뒤에 그는 지난날의 ‘향수’와 같은 전통 정서의 시로 ‘고향’을 썼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 산꿩이 알을 품고 /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 마음은 제고향 지니지 않고 /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1~3연).

그러나 같은 전통 정서이지만 ‘향수’의 생태적 읊조림에만 머물 수는 없었다. 역사의 현실이 세계의 근대 문명에 진입해 있다.

해외에 유학해 서양문학을 전공한 1세대로 김기림·박용철·이하윤·정지용 등이 이른바 해외문학파로 불리었고, 이들은 1930년에 「시문학」 잡지를 발행했다. 그리고 김기림을 필두로 해 1930년대 모더니즘 운동이 일어났다. 자연발생적 읊조림인 서정시에 머물 수 없고 지성과 세련된 감각의 언어로 시를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모더니즘 문예운동에도 정지용이 참여해 있었다.

정지용 동상.

1933년 발행된 「가톨릭청년」.

■ 시인의 일용할 양식

1930년대 초반 같은 시기에 「가톨릭청년」 잡지가 간행되었고, 정지용은 가톨릭 신자로서 다른 모더니스트들과는 다른 의식세계를 가지고 있었다. ‘가톨릭 2000년간 교양의 원천’ 의식이다. 그것은 종파적 근본주의라든가 호교의식이 아니고 인류 보편의 가치를 뜻하는 것이다.

정지용 시인은 「가톨릭청년」 지면에 여러 편의 신앙 시를 발표했다.

“그의 옷자락이 나의 오관에 사무치지 않았으나 / 그의 그늘로 나의 다른 하늘을 삼으리라”(‘다른 하늘’ 부분) “얼굴이 바로 푸른 하늘을 우러렀기에 / 발이 항시 검은 흙을 향하기 욕되지 않도다 // 곡식알이 거꾸로 떨어져도 싹은 반드시 위로! / 어느 모양으로 심기어졌더뇨? 이상스런 나무 나의 몸이어!”(‘나무’ 부분)

정지용의 이러한 시들은 절제와 밀도를 지닌 언어이다. 이러한 시에 연관해 정지용은 자신의 깊은 신앙을 산문으로 밝히고 있다.

“정신적인 것의 가장 우위에는 학문 교양 취미 그런 것보다도 사랑과 기도와 감사가 있다. 그러므로 신앙이야말로 시인이 일용할 양식이 아닐 수 없다… 숙련에서 자만하는 시인은 마침내 매너리스트로 가사 제작에 전환하는 꼴을 흔히 보게 된다. 고전적인 것을 진부로 속단하는 자는 별안간 뛰어드는 야만일 뿐이다. 꾀꼬리는 꾀꼬리 소리밖에 발하지 못하나 항시 새롭다. 숙련에서 운다는 것은 불명예이리라. 오직 생명에서 튀어나오는 항시 최초의 발성이어야만 진부하지 않는다. 시인은 완전히 자연스러운 자세에서 다시 비약할 뿐이다. 우수한 전통이야말로 비약이 발디딘 곳이 아닐 수 없다.”(‘시의 옹호’ 부분)

1939년에 발표한 이 ‘시의 옹호’ 내용은 현대 가톨릭 사상계에서도 예사롭지 않게 옹골차고 심오하다.

정지용 시인의 산문 ‘시의 옹호’에는 두 가지 요점이 있다. 하나는 ‘전통’에 대한 존중이다. 이것은 정지용의 경우 스승인 가람 이병기의 언문 민족주의이다. 「가톨릭청년」 잡지를 편집하면서도 정지용은 이병기의 ‘조선어 강화’를 계속 청탁해서 실었다. 이것은 민족문화 전통에 대한 옹호이다. 다른 하나는 “생명에서 튀어나오는 최초의 발성으로서 진부하지 않은 언어”에 대한 존중이다. ‘언어’에 대한 이와 같은 존재론적 인식은 원래 가톨릭 신학에 근거하는 것이다. 성경의 요한복음 초두에서도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다”고 했다. 가톨릭 신학자 카를 라너는 “존재 근원으로부터 오는 원초적인 산 언어”에 의해 진정한 시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정지용 시인과 카를 라너 신부는 같은 또래 나이이다. 서로 모르는 사이였겠지만 그야말로 ‘2000년 교양의 원천’에서 서로 통했는지 모르겠다.

구중서 (문학평론가)rn1960년대부터 문학평론 활동을 계속해왔다. 서울대교구 가톨릭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