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군인주일 특집] ‘군대 간 수녀님’ 자운대본당 병사 담당 김선희 수녀

서상덕 기자 sang@catimes.krrn박지순 기자
입력일 2016-09-27 수정일 2016-09-30 발행일 2016-10-02 제 3013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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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들에게 늘 말하죠, 군생활 헛되다 여길수록 고통만 커진다고”

자운대본당 병사 담당 소임을 맡아 활동하고 있는 김선희(헬레나) 수녀가 9월 24일 견진교리를 받는 병사들과 이야기하며 성당 마당을 걷고 있다. 전역자들도 함께 했다.

■ 전례봉사, 성경 읽기 함께

“이럴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미국에서 한인 교포사목을 마치고 귀국한 그에게 수녀회에서 제안한 새 소임은 군사목이었다. 당장 귀국해서 힘들 테니 쉬엄쉬엄 새롭게 적응해보라는 선배들의 배려(?)였다.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웃음)

지난 2014년 8월부터 군종교구 육군교육사령부 자운대본당(주임 유현상 신부)에서 병사 담당 소임을 맡아 활동하고 있는 김선희(헬레나·툿찡 포교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수녀와 군인들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김 수녀 손에서는 먹을거리가 떠날 때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잠자리에 있는 시간을 빼곤 그의 주위엔 늘 군인들 천지다. 육군교육사령부를 필두로 육군종합군수학교, 합동군사대학교, 자운대근무지원단, 육군정보통신학교 등 그의 발길이 닿는 곳만 10개 부대가 넘는다. 이들 부대를 관할하는 자운대본당에 첫발을 디딘 후 그의 눈에 군인들이 들어오지 않는 때가 없다.

교육부대라 매주 수요일 저녁 세례식이 열린다. 적게는 한두 명에서 많게는 예닐곱 명의 군인들을 주님께로 이끄는 일이 김 수녀의 기본 소임이다. 스무 명에서 많을 때는 서른 명 넘는 병사들이 활동하고 있는 본당 병사 사도회도 그의 몫이다. 미사 해설과 성가 반주 등 전례봉사는 물론이고 성경 읽기 등을 함께하고 나면 하루해가 금방 저문다.

화~금요일에는 찾아가는 선교에 나선다. 먹을거리를 싸들고 관할 부대 장병들을 만나러 가는 시간은 지금도 가슴에 떨림을 전해준다.

매주 수요일 오후 부대에서 열리는 장병 인성교육도 맡고 있는 터라 적게는 100명에서 많게는 500명이 넘는 군인들을 위해 장을 보는 일도 김 수녀의 필수 일과가 된 지 오래다.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특히 군사목 현장에서는 발품을 파는 만큼 활동비가 더 들어가기 마련입니다.”

군영에서 지내는 날이 거듭될수록 김 수녀의 빠듯한 주머니는 더 헐거워지고 있다.

견진교리를 하고 있는 김 수녀.

■ 힘든 군생활에서 만난 엄마

자운대성당에서 견진성사가 마련된 9월 25일.

이날 행사 자리에는 이동혁(가브리엘·23·대전교구 천안 성정동본당)씨도 함께하고 있었다. 합동군사대학교에서 복무하다 이미 한 해 전인 2015년 9월 전역한 이씨도 이날 견진성사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하루 전날 자운대성당을 찾은 그는 옛 후임병, 동료들과 피정을 함께하며 모처럼 옛 추억에 젖어들었다.

“저는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수녀님과 함께하며 많은 것을 배우고 삶의 방향도 찾을 수 있었으니까요.”

김 수녀가 만든 밴드에서 반주 봉사를 하며 무사히 군생활을 마칠 수 있었던 그는 자운대본당에 일이 있을 때면 언제든 달려와 후배들을 응원하며 힘을 보탠다.

9월 초 전역하고 다음 달 출국을 앞두고 있는 김민석(사도 요한·23)씨도 고향인 경남 울산에서 4시간 넘는 길을 되짚어 자운대성당을 찾았다.

“수녀님은 저희들에게 엄마 같은 존재였습니다. 저희들보다 저희를 더 잘 아시는 것 같았습니다.”

지긋지긋하게만 여겨지던 곳을 다시 찾아오게 될 줄은 자신도 몰랐다고.

“군에 와서 세례 받고 난 후 모든 게 달라졌습니다. 전에는 눈에 안 들어오던 성당이나 수녀님들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어요.”

근무지원단 복무 중 자운대본당 밴드에서 보컬로 활동하기도 한 그는 감사하는 마음을 꼭 전하고 싶다고 했다.

“감사하는 마음을 품고 전역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제 군생활은 헛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시간을 만들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군생활을 하실 분들이라면 꼭 신앙생활을 하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이런 선배를 바라보는 이자헌(시메온·25·56정보통신대대) 상병의 눈길도 예사롭지 않다. 힘든 이등병 시절을 보내고 있을 때 먼저 다가온 사람이 김 수녀였다.

밴드에서 기타와 드럼을 맡고 있는 이 상병은 거리낌 없이 김 수녀를 엄마라고 부른다.

“군대라는 곳에서 수녀님 같은 분을 만나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자도 하기 힘든 일인데, 힘든 내색 없이 일을 만들어 가시는 모습을 보면 저도 힘을 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8월 병사 밴드 공연에 앞서 연습하고 있다.

■ 군번 없는 군인으로, 사랑을 전하다

김 수녀의 일과는 군인들을 깨우는 기상나팔 소리보다 빨리 시작된다.

한 주를 사이클로 매주 반복되는 일과지만 어제와 같은 오늘은 없다. 매일 오가며 만나는 군인 장병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한두 곳의 관할 부대를 돌며 적게는 10~20명에서 많게는 500명이 넘는 군인들을 만나야 하는 김 수녀의 가슴속에는 지금도 식지 않는 마음이 있다. 병사들에게 군생활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심어주는 것이다.

“의무로 군에 왔지만, 짧지 않은 군복무 기간을 헛되다고만 여긴다면 그만큼 고통스런 일도 없을 것입니다.”

김 수녀가 병사들과의 만남에서 특별히 힘을 기울이는 것이 그들의 자존감을 찾아주는 일이다. 물론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병사들의 이름을 찾아주는 일부터 시작했다.

“병사들을 군으로 부른 나라에서 이들을 책임져야 하지만, 충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병사들의 자존감을 되찾아주고 생기를 북돋울 때 전력은 그만큼 커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같은 생각에 본당에 병사들이 주축이 된 밴드를 만들기 위해 발로 뛰었다. 찬양 안에서 청년들을 하나로 묶고 음악으로 군생활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악기를 다루는 장병들을 찾아 전문 레슨지도를 받게 하는 등 열정을 쏟았다.

오가며 만나는 장병들과 상담을 하며 그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진로를 함께 고민해주는 일도 일과의 중요한 부분이 됐다.

“저는 병사들이 자신들의 고통에서 한 발짝 물러서서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내어주는 정도죠.”

하지만 그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통제된 군이라는 시공 안에서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자신들을 지켜보는 이들이 있다는 체험을 한 병사들은 부쩍 성장해나갔다. 가끔씩 만나던 이웃 부대원들은 ‘절친’이 됐고 어느새 형제처럼 지내는 사이가 됐다.

“비슷한 또래들이 서로 나누는 사이, 서로가 서로에게 다리가 되어주고 통로가 되어줄 수 있다는 체험을 할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해주는 것이 군사목의 역할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 수녀의 이런 마음이 통했음일까, 전역한 병사들 가운데 지금도 자운대성당을 찾는 이들이 10명이 넘는다. 군복무 중 맺어진 인연을 지금껏 이어가며 자기들끼리 모임을 이어가는 이들도 적지 않다.

“주님은 완벽한 군인보다는 당신을 닮은 완전한 사람을 원하십니다.”

김 수녀가 생각하는 완전한 사람은 사랑을 나눌 줄 알고 사랑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군번 없는 군인’으로 오늘도 군영을 누비고 있을 김 수녀가 지닌 가장 든든한 무기는 역시나 사랑이다.

<서상덕 기자>

■ 한국교회 첫 군종 수녀는

성가소비녀회 권희집 수녀 등 한국전쟁 중 군병원서 활동

현재 40여명이 군종교구청 전후방 군본당서 복음화 일익

군종 사제들을 도와 군사목의 한 축을 맡고 있는 군종 수녀들의 활동은 6·25 전쟁 기간 중 부상 군인들을 치료하기 위해 세워진 군병원에서 시작됐다. 한국교회 최초의 군종 신부인 최익철 신부(서울대교구 원로사목자)가 부산 군병원에서 사목하던 1952년 전후한 시기에 최 신부를 도왔던 성가소비녀회 권희집 수녀 등을 최초의 군종 수녀로 볼 수 있다.

6·25 전쟁 뒤 각 수녀회에서 군사목에 다시 참여한 것은 1960년 무렵이다. 공군 대구기지에서는 1960년부터 매주일 두 명의 수녀가 부대에 찾아와 장병들에게 성가 지도를 비롯해 군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을 방문, 위로했다. 또한 대축일이나 연말에는 위문품을 전달해 특수 환경에서 근무하는 많은 장병들을 위문했다.

1969년 1월에는 툿찡 포교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수녀들이 대구 통합병원에 파견돼 매주 3회 정기적으로 병원을 방문하면서 신앙상담, 예비신자 교리 지도, 국군간호사관학교 생도들의 영성 지도, 민간 단체 위문단 초청 등의 업무를 맡아 군의 사기 진작과 전투력 향상에 기여했다.

샬트르 성바오로수녀회 서울관구는 1970년 육군본부, 1971년 가톨릭군종후원회에서 사도직을 수행했다. 1973년에는 서울 국군수도통합병원, 1979년에는 경북 영천 육군 제3사관학ᆞ교 등으로 수도자들의 사목 범위가 넓어진 데 이어 1980년대 들어서는 전방 부대까지 진출했다.

현재는 군종교구청과 가톨릭군종후원회를 비롯해 전후방 일선 군본당 등에 모두 40여 명의 군종 수녀가 파견돼 군복음화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6·25 전쟁 당시 군병원에서 활동을 시작한 군종 수녀들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주로 대도시 소재 군성당과 교육기관에서 봉사하다 1980년대 이후 전방 육군 사단까지 활동 범위를 넓혀 나간 것으로 볼 수 있다.

<박지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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