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들에게 늘 말하죠, 군생활 헛되다 여길수록 고통만 커진다고”
■ 전례봉사, 성경 읽기 함께
“이럴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미국에서 한인 교포사목을 마치고 귀국한 그에게 수녀회에서 제안한 새 소임은 군사목이었다. 당장 귀국해서 힘들 테니 쉬엄쉬엄 새롭게 적응해보라는 선배들의 배려(?)였다.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웃음) 지난 2014년 8월부터 군종교구 육군교육사령부 자운대본당(주임 유현상 신부)에서 병사 담당 소임을 맡아 활동하고 있는 김선희(헬레나·툿찡 포교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수녀와 군인들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김 수녀 손에서는 먹을거리가 떠날 때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잠자리에 있는 시간을 빼곤 그의 주위엔 늘 군인들 천지다. 육군교육사령부를 필두로 육군종합군수학교, 합동군사대학교, 자운대근무지원단, 육군정보통신학교 등 그의 발길이 닿는 곳만 10개 부대가 넘는다. 이들 부대를 관할하는 자운대본당에 첫발을 디딘 후 그의 눈에 군인들이 들어오지 않는 때가 없다. 교육부대라 매주 수요일 저녁 세례식이 열린다. 적게는 한두 명에서 많게는 예닐곱 명의 군인들을 주님께로 이끄는 일이 김 수녀의 기본 소임이다. 스무 명에서 많을 때는 서른 명 넘는 병사들이 활동하고 있는 본당 병사 사도회도 그의 몫이다. 미사 해설과 성가 반주 등 전례봉사는 물론이고 성경 읽기 등을 함께하고 나면 하루해가 금방 저문다. 화~금요일에는 찾아가는 선교에 나선다. 먹을거리를 싸들고 관할 부대 장병들을 만나러 가는 시간은 지금도 가슴에 떨림을 전해준다. 매주 수요일 오후 부대에서 열리는 장병 인성교육도 맡고 있는 터라 적게는 100명에서 많게는 500명이 넘는 군인들을 위해 장을 보는 일도 김 수녀의 필수 일과가 된 지 오래다.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특히 군사목 현장에서는 발품을 파는 만큼 활동비가 더 들어가기 마련입니다.” 군영에서 지내는 날이 거듭될수록 김 수녀의 빠듯한 주머니는 더 헐거워지고 있다.■ 한국교회 첫 군종 수녀는
성가소비녀회 권희집 수녀 등 한국전쟁 중 군병원서 활동 현재 40여명이 군종교구청 전후방 군본당서 복음화 일익 군종 사제들을 도와 군사목의 한 축을 맡고 있는 군종 수녀들의 활동은 6·25 전쟁 기간 중 부상 군인들을 치료하기 위해 세워진 군병원에서 시작됐다. 한국교회 최초의 군종 신부인 최익철 신부(서울대교구 원로사목자)가 부산 군병원에서 사목하던 1952년 전후한 시기에 최 신부를 도왔던 성가소비녀회 권희집 수녀 등을 최초의 군종 수녀로 볼 수 있다. 6·25 전쟁 뒤 각 수녀회에서 군사목에 다시 참여한 것은 1960년 무렵이다. 공군 대구기지에서는 1960년부터 매주일 두 명의 수녀가 부대에 찾아와 장병들에게 성가 지도를 비롯해 군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을 방문, 위로했다. 또한 대축일이나 연말에는 위문품을 전달해 특수 환경에서 근무하는 많은 장병들을 위문했다. 1969년 1월에는 툿찡 포교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수녀들이 대구 통합병원에 파견돼 매주 3회 정기적으로 병원을 방문하면서 신앙상담, 예비신자 교리 지도, 국군간호사관학교 생도들의 영성 지도, 민간 단체 위문단 초청 등의 업무를 맡아 군의 사기 진작과 전투력 향상에 기여했다. 샬트르 성바오로수녀회 서울관구는 1970년 육군본부, 1971년 가톨릭군종후원회에서 사도직을 수행했다. 1973년에는 서울 국군수도통합병원, 1979년에는 경북 영천 육군 제3사관학ᆞ교 등으로 수도자들의 사목 범위가 넓어진 데 이어 1980년대 들어서는 전방 부대까지 진출했다. 현재는 군종교구청과 가톨릭군종후원회를 비롯해 전후방 일선 군본당 등에 모두 40여 명의 군종 수녀가 파견돼 군복음화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6·25 전쟁 당시 군병원에서 활동을 시작한 군종 수녀들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주로 대도시 소재 군성당과 교육기관에서 봉사하다 1980년대 이후 전방 육군 사단까지 활동 범위를 넓혀 나간 것으로 볼 수 있다. <박지순 기자>서상덕 기자 sang@catimes.krrn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