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국악성가 하늘나라] 형제들의 배려

강수근 신부(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수도회 한국관구장),1992년 사제로 서품됐다. 미국
입력일 2016-08-02 수정일 2016-08-03 발행일 2016-08-07 제 3006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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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과 양악 접목에 열정 쏟아

성가 토착화’에 매진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제2의 성소라는 확신이 들자 제 마음은 바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이 일을 실행하기 위해 제 부족한 부분을 메꾸는 일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악에 대해서는 어린 시절부터 제대로 공부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었지만, 성가 부분에 대해서는 솔직히 자신이 없었습니다. 비록 미국에서 교회음악 석사학위를 받아오긴 했지만 수박 겉핥기식으로 공부했던 것이어서 그 공백을 메꾸려면 보다 전문적인 작곡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지요. 제가 추구하는 성가 토착화는 단순히 국악적인 선율로 이뤄진 성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국악과 양악을 접목시켜 현대적인 감각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한국적인 색채가 뚜렷한 성가를 만들어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제대로 이뤄내려면 서양음악의 작곡 기법들을 기초부터 다시 공부하는 일이 꼭 필요했고 이 공부를 위해 가장 좋은 학교는 바로 로마에 있는 ‘교황청립 교회음악대학’(Pontificio Istituto di Musica Sacra, 약칭 PIMS)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미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처지여서 다시 로 마로 유학을 가고 싶다는 말을 꺼내기가 참 힘들었습니다. 예수고난회 역사상 한 사람이 두 번 유학을 다녀온 경우는 없는 데다가, 작곡과 학위를 따려면 최소한 6년이 소요되고 언어 준비기간까지 보태면 7년이란 긴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라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지요. 한동안 고민을 하다가 “이건 내 욕심이 아니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니 하느님께서 정말 원하신다면 알아서 길을 열어 주시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준관구장이셨던 김준수 신부님께 의논을 드렸지요. 제 어려운 처지를 잘 알고 계셨던 광주가톨릭대학교 총장 김민수 신부님께서는 일부러 준관구장님을 찾아와 “강 신부가 교회를 위해 큰일을 할 수 있도록 수도회에서 배려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하시며 적극적으로 지원사격을 해주셨습니다. 성공적인 두 번의 성대한 연주회 또한 준관구장님께 영향을 미친 것 같았습니다.

제 고민을 들은 김준수 신부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강 신부님의 유학을 찬성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공동체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사안이므로 내가 개인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강 신부님이 형제들을 설득해 3분의 2 이상의 동의를 얻어 오면 허락을 해주겠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듣고 뛸 듯이 기뻤습니다. 애초에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일단 가능성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저는 즉시 형제들을 개인적으로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형제들은 제가 유학을 가기보다는 공동체에 남아 봉사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고난회의 울타리를 넘어 더 큰 교회 차원에서 봉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달라는 제 호소에 대부분의 형제들이 아쉬워하면서도 마음을 바꾸어 유학을 지지해주었습니다. 이것은 결국 제 성소에 대한 공동체의 식별과정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 로마유학이 결정됐습니다. 지금 돌아봐도 어떻게 이런 결정이 가능했는지 참 꿈만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임이 분명합니다. 큰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교회를 위해 기꺼이 배려해주신 형제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강수근 신부(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수도회 한국관구장),1992년 사제로 서품됐다. 미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