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교황 주일 특집] 역사 안에서의 교황

이주연 기자
입력일 2016-06-22 수정일 2016-06-22 발행일 2016-06-26 제 3000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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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베드로부터 프란치스코 교황에 이르기까지 266대에 걸친 2000년 교황직의 역사는 세계사에서 가장 오래된 제도이면서 교회의 역사인 동시에 서양의 역사이기도 하다. “베드로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는 암브로시오 성인의 표현처럼 유구한 역사 속에서 교황직은 사도로부터 이어져 오는 신앙의 일치를 가시적으로 드러내 왔다. 교황 주일을 맞아 세계 역사 안에서 교황직이 어떤 흐름으로 변화해 왔는지 살펴본다.

성 베드로

■ 고대교회

권위 커졌지만 동서 교회 분리에 영향

초대교회 때부터 로마 주교들은 ‘베드로의 후계자’라는 위치로 전체 교회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이단자들은 자기변명을 주장하기 위해, 또 교부들은 반대파의 핍박을 피해서 로마의 보호를 요청했다. 콘스탄틴 대제가 로마제국 수도를 비잔틴(후에 콘스탄티노플)으로 옮긴 뒤 정치적 비중은 줄었으나 로마 주교 즉 교황의 종교적 권위는 더욱 커졌다. 여러 신학적 논쟁 가운데서도 결의 사항들은 교황의 명시적 혹은 묵시적 동의를 얻어야 했다.

서로마제국 멸망 무렵에 교황은 서유럽의 수호자로 출현했다. 게르만 민족을 복음화시키고 수도회와 성당을 통해 문화를 전수하는 역할을 했다. 대 그레고리오 1세 교황(590~604년)에 의해서는 교황령이 새롭게 정리됐다. 동방교회와의 관계 개선과 교황 수위권 사상의 강화에 관심이 컸던 그는 로마의 수위권을 끊임없이 강조하며 동방에서의 로마 항소권을 유지했고, 베드로가 위임한 대로 콘스탄티노플을 포함한 모든 교회가 로마 권한 아래 있음을 주장했다. 그러나 동로마 황제 후광을 입고 있던 콘스탄티노플 총주교들은 교황과 동등한 수위권을 요구하며 계속해서 교황 수위권에 도전했다. 이는 결국 동서 양교회가 분리되는 바탕이 됐다.

성 그레고리오 7세 교황

■ 중세교회

왕권의 간섭으로 수위권 ‘흔들’

게르만 민족들이 개종하면서 서유럽에는 많은 왕국이 형성됐다. 교황은 이들 왕권에 교회의 보호를 요청했다. 초기에는 교황이 왕권의 뒤를 돌보아 주는 형세였지만, 왕권이 비대해지면서 이들은 교회 보호를 명분으로 간섭을 일삼게 됐다. 8세기 동프랑크의 칼 대제가 서유럽 황제로 대관식(800년)을 받은 후 교회를 옹호함과 동시에 교권에 깊이 간여했던 것, 오토 대제가 황제로 대관되고(962년) 신성로마제국을 형성하면서 교회에 간섭했던 것들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 시기 교황들은 정권의 비호와 간섭을 받으며 수위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던 것으로 드러난다. 교황권 약화는 성직자들의 기강 문란과 성직 서임권에 관한 왕권 다툼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 동방교회는 오래된 수위권 시비로 1054년 로마교회와 관계를 단절했다.

이후 교황의 권위는 서방교회에 국한됐으며 성 그레고리오 7세 교황(1073~1085년)은 ‘카노사의 굴욕’ 등과 같은 제국과의 극적인 분쟁 안에서 교권을 왕권에서 해방시켰다. 대학의 등장 등으로 시대적으로는 중세 문화가 전성기를 이룬 때였으나 14세기에 여러 명 대립 교황들의 출현으로 교황의 위신은 크게 떨어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또 ‘르네상스’가 도래하고 지리상 대발견 등으로 서유럽을 통일시키는 정신적 일치의 구심점으로서 교황이 가졌던 지위는 크게 흔들렸다.

비오 7세 교황

■ 근세교회

초국가적 권위로서 교황직 재조명

종교개혁이라는 대혁명 속에서 교황들은 교회 개혁에 착수한다. 트리엔트공의회(1545~1563년)를 통해 이단을 배격하고 교회 생활의 전 분야를 혁신하는 조처를 취했다. 성 비오 5세(1566~1572년), 그레고리오 13세(1572~1585년), 식스토 5세 교황(1585~1590년) 등이 트리엔트공의회 결정을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겼다.

로마에 포교성성을 설립(1622년), 포교 사업을 지휘하는 등 선교 수도회들이 극동 선교에 적극 나선 때다. 17~18세기 프랑스와 독일에 국수주의적 교회관이 생겨 갈리아주의 등 소위 정교 분리 사상이 일어난 때로도 기록된다. 또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의 승리는 전반적인 교황권 실추를 초래했다고 교회사가들은 밝힌다. 이 때 나폴레옹에 의해 프랑스로 끌려가 죽음을 맞아야 했던 비오 6세 교황(1775~1799년)과 후임 비오 7세 교황(1800~1823년)의 용기는 교황직을 재조명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비오 6세 교황은 나폴레옹이 교황령을 점령한 후 수장에서 물러나게 됐고 프랑스 발랑스로 이송, 그곳 성채에서 죄수 신분으로 죽음을 맞는 수모를 겪었다. 사람들은 교황직의 종말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가 남긴 ‘비상시 차기 교황 선거 지침’에 따라 교황에 선출된 비오 7세 역시 나폴레옹에 의해 억류 생활을 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비오 7세 교황은 바티칸 복귀 후 포교성성의 재설립 등 정통 신앙의 수호자로서 역할을 다했고, 이러한 일련의 사건 속에서 사람들은 초국가적 권위로서 교황직을 새롭게 바라보게 됐다.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반도 중부를 넓게 차지했던 교황령(756~1870년)은 영토 대부분이 1860년 통일 이탈리아 왕국에 의해 강제 합병되었고, 1870년에 로마 지역과 함께 나머지 다른 지역도 거의 모두 이탈리아에 합병됐다. 근 천년을 유지해 오던 교황 영토가 합쳐짐으로써 교황의 속권(俗權)은 사라지게 됐다.

제1차 바티칸공의회(1865~1870년)에서는 ‘파스토르 애테르누스’(Pastor aeternus·영원한 사목자)가 발표됨으로써 “교황이 신앙과 도덕으로 내린 공식적 정의는 교회의 합의의 결과가 아니라, 교회 자체의 능력의 산물이므로 ‘무류적’”이라는 입장이 선언됐다. 이는 교황직에 대한 수세기 동안의 교의적 발전을 완료하고 공의회 결의가 교황권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는 공의회주의자들의 해석을 무너트렸다.

한편 과학만능주의와 유물론 등의 성행으로 유럽 여러 나라들이 교회를 벗어나고 있던 시대 상황 속에서 교황들은 당면한 사회 문제에 맞서 목소리를 내고 교회 내에서도 개혁을 추진했다. 사유재산 뿐 아니라 공정한 임금, 노동자의 권리, 노동조합을 지지했던 레오 13세 교황(1878~1903년)의 회칙 「새로운 사태」 발표를 비롯해 ‘교회음악 개혁’, ‘미사경본 수정’ 등으로 현대 전례운동의 개척자로 인정받는 성 비오 10세 교황(1903~1914년)의 역할이 그러하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 현대교회

세상과 꾸준히 대화하며 큰 울림 선사

세계대전을 거친 후 점차 ‘탈(脫) 그리스도교화’ 하는 세상 속에서 교회는 세상과의 대화를 적극 시도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성 요한 23세 교황(1958~1963년)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1~1965년)를 통해 교회의 쇄신과 개방을 선언하면서 복자 바오로 6세(1963~1978년), 성 요한 바오로 2세(1978~2005년), 베네딕토 16세(2005~2013년) 등 후임 교황들은 현대교회 안에서 공의회 정신 구현을 위해 계속 노력해 왔다.

특별히 교황 선출 후 추기경단 앞에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신중하지만 온전한 실행’의 헌신을 맹세했던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제삼천년기를 맞이할 기반을 닦으며 ‘평화의 사도’로서의 모습을 세상에 남겼다. 5개 대륙 190만 여 ㎞를 다니며 ‘세계 선교사적’ 면모를 강조했다. 공산주의 붕괴에 영향을 준 그의 노력은 역사적으로 가장 주목할 만한 공헌이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교회를 넘어 전 세계인들에게 교황직에 대한 관심을 집중시켰다고 학자들은 평가한다.

현재의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난, 섬김, 겸손을 새 시대 정신으로 제시하면서 세상 안에 울림을 주고 있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