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자비의 희년 기획- 아버지처럼 자비로이] (5) 자선활동의 확대

최용택 기자
입력일 2016-06-14 수정일 2016-06-15 발행일 2016-06-19 제 2999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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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금 냈으니 자선활동 임무 끝?”
도움 필요한 이들 찾아 애덕실천도
교황, 자비의 희년 선포하며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 위한 육체적 활동에 대해서도 강조
한국교회, 다양한 복지시설 운영 자선은 하느님 정의 실현하는 것 상처받은 이들 영혼까지 돌봐야

“저는 이 (자비의 특별) 희년에 그리스도인들이 자비의 육체적 영적 활동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는 가난이라는 비참함에 무뎌진 우리의 양심을 다시 일깨워 주고, 또한 복음의 핵심을 더욱 깊이 이해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자비의 희년 15항)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비의 희년을 선포하면서 ‘아버지처럼 자비로워져라’고 당부했다. 특히 자비의 육체적 활동에 대해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곧 우리가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이들에게 마실 것을 주며,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고, 나그네들을 따뜻이 맞아주며, 병든 이들을 돌보아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죄인이나 가난한 이들, 버림받은 이들, 병자들, 고통받는 이들에게 기적을 행하셨다. 이러한 모든 기적은 예수님의 자비를 보여준다. 하지만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인 우리 교회는 예수의 자비를 충분히 펼치고 이 세상을 자비로 넘치게 하고 있는가?

■ 교회의 사회복지 활동

“자선 활동은 육체적으로나 영신적으로 궁핍한 이웃을 돕는 사랑의 행위이다. 용서해주고 참을성 있게 견디어 내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가르치고, 충고하며, 위로하고, 격려해주는 행위는 영적인 자선 활동이다. 육체적인 자선 활동은 특히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집을 잃은 사람을 묵게 해 주고,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며, 병자와 감옥에 갇힌 이들을 찾아보고, 죽은 이들을 장사 지내는 것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447항)

가톨릭교회의 많은 사회복지 시설들은 교회 가르침에 따라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모든 사람들을 향해 견고한 사랑을 보내고 있다. 주교회의가 발간한 「2015년 한국 천주교회 통계」에 따르면, 한국 가톨릭교회는 1400여 개의 사회복지 기관을 직간접적으로 운영한다. 여기에는 종합사회복지관, 푸드뱅크 등 109개의 지역복지기관과 아동 양육 및 청소년 관련 복지기관 364개, 미혼모 보호시설과 가정폭력 및 성폭력 상담소 등 여성복지기관 76개, 무료 양로원과 요양원 포함한 296개의 노인복지 기관 등이 포함된다.

또한 장애인 보호 및 재활 등 장애인 관련 기관 337개, 쉼터 및 급식소, 그룹홈 포함 62개의 노숙인복지 기관, 한센인 시설 16개, 의료복지 기관 36개, 다문화가족지원센터를 포함한 사회사업기관 100여 개 등 한국교회는 말 그대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간의 복지를 위한 다양한 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시설의 규모가 커지고 정부의 보조금 지원 등을 받으면서, 가톨릭 사회복지 기관들의 역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전달이라는 의미보다는 재화의 전달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특히 안정적인 시설 운영을 위해 정부의 보조금을 받으면서 본래의 설립 목적이 의도치 않게 퇴색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한 수도회는 최근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지원을 받아 운영하던 장기노인요양기관을 폐쇄하기로 했다. 수도회는 소외된 노인을 돌보기 위해 양로원을 시작했지만, 노인장기요양보험으로는 사각지대에 있는 노인들을 모시기는 어려웠다는 게 대표적인 이유다. 수도회 측은 “정부의 보조금을 받으면서 우리의 카리스마를 지키기는 어려워, 결국 보조금을 포기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서울의 한 노인종합복지관 관장은 “교회가 운영하는 복지기관의 사회복지사들이 교회와 일치하고 교회의 정신 업무를 수행하기보다는 교회와 정부가 제공하는 재화를 복지 대상자에게 전달하는 일꾼이 되어버린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직원들이 복지 대상자들의 애환과 살림살이를 직접 보고 판단하는 대신, 서류상으로 선별하고 재원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기는 전달자 역할만을 한다는 것이다.

이 관장은 “교회 운영 복지관의 직원들은 인간에 대한 애정이나 사랑으로 가난한 이들을 살피고 돌보아야 하지만 이 일이 그저 직업이 되어버렸다”면서 “이는 교회가 갖고 있는 자선과 자비에 대한 개념이 없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 자비의 희년과 자선

초대 교부들은 자선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재화의 보편성이라는 개념에서 정의했다. 줘야 할 것을 주는 것으로 주는 것도 받는 것도 바로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난한 이에게 나의 재산을 나눠주는 것은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고 시혜가 아닌 당연한 일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가톨릭 사회교리가 말하는 재화의 보편성 원리다.

서울대교구 가톨릭사회복지회 회장 정성환 신부는 “주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하느님의 축복으로 내가 이렇게 잘살게 됐다는 것을 감사드리는 의미에서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며 정의롭게 내어놓는 것”이고, “받는 사람 역시 하느님께서 나를 축복해 주셔서 나의 어려움을 보듬어 주시고 자신이 살아갈 수 있도록 주는 것을 감사하게 받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렇게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나눔을 실천하지 못했을 때, 즉 정의를 실현하지 못했을 때 우리는 하느님 앞에 죄인이 된다. 우리가 가난한 이와 병든 이를 돌보지 않고 무관심으로 일관해 분배의 원칙과 정의가 이루지 못한다면 우리는 마지막 날 정의로운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느님은 자비로우시다. 정의의 하느님은 정의를 실현하지 않는 이들을 벌하시지만, 자비의 하느님은 우리가 회개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다려주시고 예언자와 사제들을 통해 말씀해주신다. 지금 자비의 희년은 하느님의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우리 사회가 하느님께서 우리의 회개와 자비를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을 되새기는 시기인 것이다.

■ 교회 활동의 한 축 자선활동

전국의 모든 교구는 카리타스와 사회복지회와 같은 기구를 운영한다. 이러한 기구의 운영을 위해 본당과 일반 신자들은 자선헌금을 보낸다. 또 다른 문제는 여기서 시작한다. 일반 신자들은 “자선기금을 봉헌했으니 나의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진짜 가난한 이웃, 병든 이, 감옥에 갇힌 이, 노숙인 등을 스스로 찾아보지 않는다.

정 신부는 “지금 교회의 본질인 말씀 선포와 전례 거행, 애덕실천이라는 세 축이 제대로 서 있지 않다”면서 “애덕실천이 약해지니 교회가 주저앉아 허약해졌으며 더 이상 사람들도 찾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교회가 본분을 다하지 못하니 신자들도 흩어지게 되고, 그나마 교회활동에 열심히 참여하는 신자들도 후원금만 내고 자선활동을 교구와 시설의 직원들에게 미뤄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정 신부는 “교회의 본질 중 약화되어 있는 애덕실천을 되살려야 교회가 다시금 건강해질 수 있다”면서 “하느님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 계시며 모두에게 자비를 베풀고 계시지만 우리는 과연 어디 있는가?”라고 되물었다.

■ 다시 처음으로

“자비의 해는 주님께서 선포하신 은혜의 해로 우리가 이제 살아가고자 합니다. 이 성년은 이사야 예언자의 말에서 울려 퍼진 예수님의 수많은 사명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말과 행동으로 가난한 이들을 위로하고, 현대 사회의 새로운 노예살이에 얽매인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자신 안에 갇혀 있어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이들이 다시 볼 수 있도록 하고, 존엄성을 빼앗긴 모든 이가 다시 그 존엄을 찾도록 하는 것입니다.”(자비의 희년 16항)

교회의 자선활동 강화를 위해서는 자선이 남아서 주는 것이 아닌 하느님께 받은 것을 당연히 다시 되돌려주는 것임을 확인해야 한다. 이러한 정신을 우리의 삶 안에 뿌리내리고 이를 생활화해야 한다. 여기에 하느님을 닮은 존재의 마음까지 헤아릴 줄 아는 나눔이 필요하다. 가난과 병마로 상처받고 소외된 이들의 영혼까지 돌봐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카리타스를 실천하면서 나눔과 봉사의 삶을 제대로 살아 약화된 교회를 다시 살리려는 관점에서 희년을 선포했다. 바로 정의와 공평의 관점에서 이뤄져야 하는 자선활동과 자비가 사라져가고 있는 상황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푼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다시 성찰할 때라는 것이다. 시혜가 아닌 자신을 내어놓는 하느님의 자비처럼, 우리도 생명과 가진 것을 나누는 자비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인의 책무다.

최용택 기자 johncho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