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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특집] 중화본당 신자들의 활동들

박지순 기자
입력일 2016-06-14 수정일 2016-06-15 발행일 2016-06-19 제 2999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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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던 반지 내놓고 벽돌 나르며 당시 주교좌성당 재건에 동참

6·25 한국전쟁 이전 북녘땅에 존재했던 57개 본당들은 저마다 교회사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평양교구 소속으로 평안남도 중화군 중화읍 초현리에 자리했던 중화본당 역시 평안남도와 황해도 경계에 위치한데다 평양교구 관후리주교좌성당과는 30리 거리밖에 되지 않아 북한 교회사의 많은 이야기들이 그 안에 간직돼 있다.

중화본당은 1927년 본당으로 설정돼 중화군 전 지역과 대동군 용연면 일부지역을 관할했고 관내 목재리, 서가리, 갈매리 등에 여러 공소도 있었다.

중화본당과 각 공소 신자들의 활동 중 가장 특기할 만한 사실은 북한 정권의 종교 탄압이 본격화하기 전인 1946~1947년 관후리주교좌성당 재건운동에 열렬히 동참했다는 것이다. 한 교구의 주교좌성당을 재건하는 데는 적지 않은 비용과 인력이 필요하고 평양교구 소속 본당들 역시 관후리주교좌성당을 재건하기 위해 한국교회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헌신적 모습을 보여줬다. 그 중심에는 중화본당과 소속 공소들이 있었다.

중화본당 검암리공소 출신 실향민 신자인 장명선(안드레아·80) 할아버지는 “평양교구 사제들이 공소를 순회하며 관후리주교좌성당 재건 운동 참여를 독려하면 신자들은 돈이 있는 사람은 돈으로, 돈이 없으면 반지나 비녀를 빼 기부할 정도로 뜨거운 일치를 보였다”고 말했다. 이뿐 아니라 장정들은 30리 길을 걸어서나 대동강 지류를 이용해 배를 타고 관후리주교좌성당을 찾아 며칠씩 벽돌을 지어나르며 노력봉사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결국 관후리주교좌성당은 재건을 끝내지 못하고 공산정권에 건물을 압수당하고 말았다.

중화본당 출신 실향민 신자들은 관후리주교좌성당 재건 운동에 참여한 기억을 통해 북한 정권의 종교탄압과 6·25 한국전쟁 발발로 침묵의 교회가 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천주교 신앙을 굳건히 지켰음을 자부심으로 여기고 있다.

중화본당 출신인 초대 원주교구장 고(故) 지학순 주교(1921~1993)가 1949년 5월 덕원신학교가 폐쇄된 뒤 신학생 신분으로 중화본당으로 돌아와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홀로 본당을 지키다 1950년 1월 월남한 것은 중화본당의 정체성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