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6·25 특집] 평양교구 중화본당 출신 실향민 장명선 할아버지

박지순 기자
입력일 2016-06-14 수정일 2016-06-15 발행일 2016-06-19 제 2999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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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서 신앙 지키고 있을 형제들 위해 기도할 뿐”
북한정권 원망하진 않아… 모두 용서
홍용호 주교에게 견진받던 날 기억 또렷
매월 평양교구 출신 신자들 함께 미사
후손들이라도 고향 찾는 날 빨리 오길

장명선 할아버지는 남북통일과 북녘 고향에 있었던 중화본당을 지향으로 기도를 바친다. 그는 “실향민 신자들의 기도는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가 다니던 중화본당이나 검암리공소 건물이 남아 있을 리 없어도…. 저와 어린 시절 같은 자리에서 신앙생활 했던 교우들은 틀림없이 천주교 신앙을 지키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비록 북한에 사제가 없어 미사를 드리지는 못하겠지만 기도문은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남북통일이 되기 전 북한에 종교의 자유가 먼저 허용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매일 오전 10시와 오후 3시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에서 보내주는 기도 문자가 오면 장명선(안드레아·80·서울 목3동본당) 할아버지는 북녘 고향에 있었던 중화본당과 남북통일을 위하는 지향으로 기도를 바친다. 특히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6월에 그 기도는 더욱 간절해진다.

장 할아버지는 1936년 평안남도 중화군 당정면 검암리 71번지에서 태어나 유아세례를 받고 평양교구 중화본당 소속 검암리공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그는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는 1900년 초에 천주교를 받아들인 분들로 세례명이 도밍고와 구네군다였고 아버지(장지윤·스테파노·1897년생)는 검암리공소 회장을 지내셨다”고 기억했다.

장 할아버지는 6·25가 일어난 1950년 12월 북상하던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에 밀려 후퇴하자 가족과 해주로부터 연평도와 인천을 거쳐 부산 피란민 수용소와 대청동 판잣집에서 피란살이를 했다. 휴전 뒤 1955년 서울로 올라와 1957년 성균관대 약학대학에 입학해 1961년 졸업하고 2014년까지 53년간 약사로 일하며 3남매를 출가시켰다.

“서울대교구에서 신앙생활하는 평양교구 출신 신자들이 고향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저는 1950년 월남한 후 한 번도 고향에 가지 못했습니다. 지금 고향인 중화군에 간다면 변화된 모습에 내 고향인지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르고 살아 있는 친척들도 없겠지만 죽기 전에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장 할아버지는 최근 남북 관계가 어느 때보다 경색돼 남북 대화와 교류가 단절된 상황을 몹시 안타까워하며 “저 같은 실향민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남북통일이 되기는 어려워도 하루빨리 통일이 돼서 제 후손들이라도 조상들의 고향을 찾는 날이 오기를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도 북녘땅 어디에선가 천주교 신앙을 지키고 있을 이들을 향한 애절한 마음도 표현했다.

장 할아버지는 봄이면 진달래 피고 여름이면 개구리 우는 소리로 시끄럽고 가을에는 벼 베는 손길로 분주하며 겨울에는 찬 바람이 매서웠던 70년 전 고향과 성당 풍경을 어제 일처럼 떠올렸다.

“검암리공소는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짚으로 지붕을 덮은 아담한 초가집 같았습니다. 15가정 30~40명의 교우가 매주 정성껏 공소예절을 드리고 영성체를 할 때는 공심재를 엄격히 지켰습니다. 매년 부활과 성탄을 앞두고는 본당 신부님이 공소를 방문하셨지요. 본당에 큰 행사가 있으면 공소 신자들이 본당에 찾아가며 교류했습니다.”

그는 12세 때인 1947년 중화본당에서 평양교구장 홍용호 주교로부터 견진성사를 받았다. 1949년 5월 북한 정권에 납치돼 이후 행적이 파악되지 않아 사망한 것으로 인정되는 홍 주교를 실제 만난 것은 견진성사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 당시 주교님을 만난다는 것은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어서 무척 설레였고 견진성사 선물로 성모패를 받았습니다. 홍 주교님은 키가 별로 크지 않았습니다.”

1945년 분단과 소련군의 북한 진주 후 신속하게 토지개혁이 실시된 것과 달리 종교탄압은 곧바로 시작되지는 않았다는 게 그의 증언이다. “평양에서 ‘로스케’라 부르던 소련군을 봤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1947년 무렵까지는 중화군 지역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이전과 다른 큰 변화는 없었습니다. 북한 당국이 종교활동을 방해하기 위해 주일에 군중집회나 궐기대회를 자주 열어 성당에 가지 못하게 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성당에 나오는 사람은 계속 나왔습니다.”

공포 분위기가 퍼져 나간 것은 1949년이 가까워지면서다. 농촌 마을에도 도시에서 성직자와 수도자가 체포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아 불안감이 커졌다. 중화본당 마지막 주임인 강현홍 신부가 1949년 8월 북한 정권의 탄압을 피해 월남하면서 중화본당과 공소 신자들은 목자 잃은 양이 되고 말았다.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없었던 신자들은 1950년 6월 25일 “미제가 북침해 올라와 인민군은 정정당당히 맞서 싸운다”는 북한 당국의 거짓 선전을 통해 6·25 발발 사실을 처음 접하고 고향에 남거나 월남을 택했다. 장 할아버지는 전쟁을 피해 급하게 몸만 챙겨 내려오느라 북한에서 신앙생활 할 때 사용하던 성물이나 교리교재, 성가책 등을 하나도 가져오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남북 분단의 혼란과 격동기에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을 탄압했던 북한 정권에 대한 원망이나 미움은 이제 없습니다. 모두 용서했습니다. 민족의 화해와 남북통일, 북에서 지금도 숨어서 신앙생활 하고 있을 소수의 신자들을 위해 매일 기도하고 매월 넷째 수요일에는 평양교구 출신 신자들이 명동성당에 모여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80대 고령인 평양교구 신우회 신자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면서 신우회 미사에 정기적으로 나오는 인원은 20~30명으로 줄었다.

“해가 바뀔수록 평양교구 신자들의 수는 줄어들지만 실향민 신자들의 기도는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