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기억해야 할 북녘 본당 (28·끝)

정리 박지순 기자
입력일 2016-06-14 수정일 2016-06-15 발행일 2016-06-19 제 2999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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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나진·웅기본당

나진·웅기본당은 함흥교구 소속 본당으로 두만강이 동해로 흘러들어가는 곳 남쪽에 위치한 나진군과 가난한 어부들이 모여살던 인근 웅기읍을 관할했다. 한반도를 강점한 일본은 대륙 진출을 위한 관문으로 나진, 웅기 지역을 택해 한국과 만주, 소련을 잇는 항구를 건설했다.

나진, 웅기에 자연히 인구가 늘기 시작했고 그 가운데는 천주교 신자 200여 명이 있었다. 교세는 계속 증가해 웅기읍에 본당을 창설하려는 움직임이 일어 1936년 짐머만 신부가 나진·웅기본당 주임신부로 임명됐다. 신자는 400여 명으로 늘었고 성전 건축이 논의됐다. 그러나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1945년 해방과 분단, 공산정권 수립이 이어지는 소용돌이 속에 1949년 나진·웅기본당의 모든 재산이 몰수되며 신자들은 보금자리를 잃었다.

56. 성진본당

1941년 함흥교구 소속 본당으로 설립된 성진본당은 함경북도 북동해안 북청과 나남 사이의 사목 공백을 메우기 위해 세워졌다. 성진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던 주요 항구도시였던 곳으로 그곳에 본당 설립은 피할 수 없었다. 초대 주임이자 마지막 주임인 이재철 신부는 한옥 사제관에 거주하며 신자들에게 어질고 선한 목자로 살았다.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 청진본당 초대 주임 바인거 신부가 병사한 뒤 1949년 성진본당 이재철 신부가 청진본당 제2대 주임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성진본당은 주임신부 공석으로 본당의 맥이 끊기게 됐다.

57. 계림본당

계림본당은 함흥교구 소속 회령본당으로부터 분리, 설립된 본당으로 초대 주임은 짐머만 신부가 맡았다. 1920년대 후반 회령본당의 신자는 760여 명에 공소는 13개나 됐고 1930년대 후반 일제의 종교 탄압이 가중됐지만 오히려 교세가 확장되면서 회령본당으로부터 계림본당이 분리, 설립된 것이다.

1946년 짐머만 신부가 사망하자 흥남본당 주임 구대준 신부가 자원해 계림본당의 사목을 맡았다. 그러나 공산정권의 탄압을 피할 수는 없어 1949년 5월 원산 수녀원에 피정을 지도하러 간 구 신부는 정치보위부원들에게 체포됐고 이후 그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북녘 본당 갖기’ 운동 참여신청 02-753-0815 서울대교구 민화위

정리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