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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기현 신임 마산교구장 임명] 삶과 신앙

정정호 기자
입력일 2016-04-27 수정일 2021-02-16 발행일 2016-05-01 제 2992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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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서 한센인 치료하던 어머니… 사제되기까지 이끌어준 등불

배기현 주교가 4월 11일 사파공동성당에서 봉헌된 교구 세월호 참사 2주기 추모미사를 주례하고 있다. 마산교구 제공

제5대 마산교구장에 임명된 배기현 주교는 소탈하고 겸손한 성품과 재치 있는 유머로 만나는 이들을 편안하게 해준다. 또한 ‘우애’와 ‘의리’가 남다른 배 주교 모습에 선·후배 사제들은 물론 신자들도 존경해 마지않는다. 하지만 지금의 배 주교가 있기까지 그 뒤에는 남모를 고통과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배 주교는 오히려 그 고통 속에서 하느님 자비를 깊이 체험하고,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깨닫게 됐다. 배 주교 삶의 모습들과 그 안에서 더욱 굳게 다져진 그의 신앙을 따라가 본다.

■ 자유를 넘어선 ‘방종’

배기현 주교는 1953년 2월 1일 영문학자(셰익스피어 전공)였던 아버지 배덕환(요셉) 선생과 산부인과 의사였던 어머니 전풍자(모니카) 여사 사이에서 2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유복한 가정에서 부족할 것 없이 자랐고, 자유분방한 분위기에서 생활했다. 자유는 방종으로까지 이어졌고, 고등학교 시절 정학을 네 번이나 받을 만큼 말썽도 많이 피웠다. 흔히 말하는 ‘문제아’였다. 하지만 자식에 대한 깊은 사랑이 남달랐던 어머니 전씨는 그런 그를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개신교 세례를 받았던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자식들에게 교회에 갈 것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자식들이 우연히 가 본 성당을 좋다고 하니 같은 하느님이라며 다니도록 허락했다. 형제들이 세례 받을 때 배 주교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지만 막내라는 이유로 교리도 배우지 않고 엉겁결에 세례를 받았다.

■ 탕자에서 사랑받는 자녀로 ‘제2의 탄생’

배 주교의 부모는 큰 부를 쌓을 수도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재산 한 푼 없었다. 늘 수입의 절반은 어려운 이웃을 위해 내어 놓았고, 급기야 1976년에는 잘 되던 병원을 그만두고 소록도로 이사해, 한센인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했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배 주교는 새로운 삶을 결심하게 됐다. 배 주교에게 소록도는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제2의 탄생지인 셈이다.

막연히 신부가 되겠다고 생각한 배 주교는 우여곡절 끝에 신학교에 입학했지만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았던지라, 신학교 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아침마다 일어나기는커녕 기도와 미사도 빠지기 일쑤였다. “위의 학생은 1년 남짓한 신학교 생활동안 신앙이라곤 일점일획도 볼 수 없었다.” 당시 신학교에서 교구로 보낸 증언서 내용이다. 결국 1학년 2학기 신학교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했지만, 당시 ‘3선 개헌’ 사건으로 귀가 조치가 취해진 덕분에 무사히 2학년에 올라가게 됐다.

배 주교는 남들과 같아지려면 엄청난 고생을 겪어봐야 겨우 ‘중간’은 되겠단 생각으로 군대에 지원해 공수부대로 가게 됐다. 낙하 중 사고로 허리와 무릎을 크게 다쳐 지금까지 크고 작은 수술만 11차례나 받았다. 그럼에도 배 주교는 “드디어 ‘중간’이 되어 돌아왔다”며 기뻐했다고.

■ ‘파적(破寂)대사’로 지낸 신학교 생활 12년

배 주교는 건강 문제로 휴학을 많이 했다. 더 이상 휴학할 수가 없어 자퇴 후 재입학하기까지 했다. 자그마치 12년 동안 신학교 생활을 한 셈. 그는 심한 통증에 몸부림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았다. “내 허리를 밟으신 하느님, 내 입맛을 떨구게 하지 않으시니 찬미 받으소서!” 아플 때마다 욥기를 많이 읽었던 배 주교의 ‘욥기 패러디’ 기도다.

서품동기인 조명래 신부(산청본당 주임)는 “병상에 누워있을 때가 영혼이 살찌는 시기라고, 고통 속에서 오히려 단련된 것 같다”며 “매우 긍정적이고 사람을 끌어들이는 카리스마가 있는 분”이라고 전했다.

신학교 생활을 오래한 만큼 배 주교는 동기나 후배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상담사 역할을 자처했다. 신학생들에게 그는 힘들 때마다 언제든지 찾아가 털어놓고 나눌 수 있는 큰형님 같은 존재였다. 신학교는 대침묵이 엄격한 곳이지만 그의 방엔 대침묵이 없었다고. 그래서 붙은 별명이 ‘파적(破寂)대사’였다. 고요함을 깨트린다는 의미다.

배 주교와 오랜 시간 가까이 지내온 이연학 신부(파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원)는 “배 주교님은 자신의 약함을 정직하게 잘 알고, 그런 허약함을 통해 하느님 자비를 더 깊게 알아가셨다”면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처럼 주교님도 스스로를 ‘하느님께서 자비로이 바라봐 주신 죄인’으로 느끼고,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신 분”이라고 말했다.

■ 어머니와 스승

배 주교에게는 두 사람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하나는 어머니이고, 다른 하나는 스승인 정달용 신부이다.

어머니 전씨의 깊은 사랑과 신앙은 배 주교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어머니가 남겨준 신앙 일기는 그가 이 길을 끝까지 가도록 이끌어준 힘이 되고 있다. 배 주교가 신학교 2학년 때 너무 힘들어 뛰쳐나왔을 때도, 모두가 안 된다고 할 때조차도 어머니는 자식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희망을 걸고 있었다. “깜깜한 밤에 명주실 한 가닥 보는 것 같았지만 하느님께서 비추신다면 혹시 부르실 지도 모른다.”

배 주교는 정달용 신부(대구대교구 원로사목자)에게 철학하는 법을 배웠다. 그에게 정 신부는 단순한 스승 그 이상이다. 교황청대사관에서 순명서약을 마친 후 곧장 대구로 내려가 정 신부를 찾아간 것도 스승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보여준다. 자신을 믿어주고 사랑으로 이끌어 주는 정 신부 덕에 배 주교는 서른여섯 늦은 나이에 유학길에 올랐다. ‘공부 10분 걱정 50분’의 삶이었지만 자신을 믿고 지지해 준 정 신부 덕에 7년간의 유학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귀국 후 배 주교는 부산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후배들을 사랑으로 이끌며 후학 양성에 힘쓰는 모습은 그의 스승 정달용 신부 모습과도 꼭 닮아있다.

배기현 주교 돌 사진.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 어머니와 함께했다.

1968년 12월 마산 월남동성당에서 열린 배 주교의 세례식. 둘째 줄 왼쪽 첫 번째가 배 주교(교복입은 학생).

1985년 1월 28일 마산 월남동성당에서 거행된 배 주교의 사제서품식.

인스부르크대학교 유학 시절 한국 유학생들과 함께한 배 주교(오른쪽에서 세 번째) 대구대교구 이경수 신부 제공

정정호 기자 piu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