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영성의 뿌리] 윤을수 신부

김진영 기자
입력일 2016-01-20 수정일 2016-01-20 발행일 2016-01-24 제 2979호 2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지속적 사회사업 위해 수도회 창립
인보성체수도회 제공
‘카리타스(Caritas)’를 ‘인보(隣保, 이웃사랑)’라는 말로 번역한 사제가 있다. ‘인보’라는 단어에는 어려움에 빠진 이웃을 살피고, 그 이웃이 필요로 하는 것을 나눠주고, 도와주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1907년 충남 예산군 고덕면 용리에서 부친 윤창규(이냐시오)와 모친 임 골롬바의 2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난 윤을수는 1920년 서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해 1932년 사제품을 받았다.

서품 후 장호원본당(현재 감곡본당) 보좌와 동성소신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이 시기에 잡지 「가톨릭 청년」에 성서연구를, 「가톨릭연구」에 호교론을 발표하고, 「라한사전」을 간행했다.

1937년 프랑스 파리 소르본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1939년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졸업해 한국인 최초의 박사 신부가 됐다.

윤 신부는 일제의 창씨개명 압박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문화원 교수로 지내며 독립 운동에 투신했다.

1948년 귀국해 성신대학(현 가톨릭대학교) 제2대 학장으로 취임했고, 1942년 초판을 발행했던 「준주성범」을 재발행해 한국교회의 영성적 발전에 공헌했다.

한국교회 최초의 박사로서 학자의 길을 걸으리라 여겼던 교회의 기대와는 달리 윤 신부는 한국전쟁 이후 피폐해진 조국과 민중들의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 사회사업을 통한 복음선포에 전념한다.

인보성체수도회의 설립 계기도 그의 사회사업과 연관돼 있다. 1951년 미 육군 제1군단 군종사제로 사목하던 윤 신부는 전쟁 고아들의 보금자리인 ‘골롬바사’를 설립해 원장에 취임했고, 그 해 8월에는 세검정에 골롬바 어린이집을 창설해 본격적으로 고아들을 돌봤다. 이후 어린이집은 소사, 청평, 덕산으로 확장돼 700여 명 고아들의 아버지가 됐다.

복음 선포를 위한 지속적인 사회사업을 위해서, 전문적인 사회사업가의 양성이 필요하다고 본 그는 1956년 한국 최초의 사회사업전문학교인 2년 과정의 구산후생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에 입학한 학생들 중 수도생활에 뜻을 두고 온 이들이 있어 그들을 수도반으로 편성해 공동체 생활을 하며 사회사업 교육과 수도생활 교육을 받게 한 것이 인보성체수도회의 시작이었다.

1958년 6월 5일 서울교구장 노기남 주교의 주례로 24명의 회원이 첫 서원을 하고, 1960년 10월 1일 노기남 주교에 의해 서울교구 소속 수도회로 인가됐다. 1965년 11월 25일에는 수도회가 전주교구로 전속됨에 따라 본원이 전주로 이전됐다.

윤 신부가 직접 밝힌 수도회 설립 이유는 성체신비를 공경하고 성체성사의 뜻에 깊이 박혀 있는 정신을 따라서 살도록 하는데 있다.

그는 수녀들이 수도생활을 통해 자기처럼 유일한 행복의 힘은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데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말씀, 가르침만을 따르고 그분을 모방하는 것에만 마음을 두는 행복한 그리스도의 참 제자이기를 바랐다.

윤을수 신부는 1971년 5월 9일 지병으로 선종했다.

인보성체수도회는 설립자의 영성에 따라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그대로 이웃, 특히 가장 도움을 필요로 하는 어렵고 가난한 이웃을 그분처럼 섬기고 끝까지 사랑해 구원에 이르는 기쁨을 누리고 그 기쁨을 전하고자 하고 있다.

김진영 기자 (nicolao@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