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세계 평화의 날 담화(요지)]

최용택
입력일 2015-12-28 수정일 2015-12-28 발행일 2016-01-01 제 2976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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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의 문화 촉진으로 평화 위협하는 무관심 극복을”
하느님에 대한 관심 부재는 이웃·피조물 향한 태도에 악영향 사회적 불평등·자연파괴 등 야기
형제애에서 시작되는 ‘연대’ ‘공동선 위한 투신’ 만들어
가정·일터에서 변화 이끌고 ‘인간다운 사회’ 위해 노력해야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6년 1월 1일 제49차 세계 평화의 날을 맞아 ‘무관심을 극복하고 평화를 이룩하십시오’라는 제목의 담화를 발표했다. 이 담화에서 교황은 연대와 자비의 문화 촉진을 통해 평화를 위협하는 무관심을 극복하자고 호소했다. 가톨릭교회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인 1월 1일을 세계 평화의 날로 정해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이날은 복자 바오로 6세 교황이 1968년에 지정했다. 이후 교황들은 매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문을 발표하고 있다. 다음에서는 2016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문을 요약해서 전한다.

희망의 이유를 견지하기

안타깝게도 납치, 민족 박해나 종교 박해, 권력 남용과 같은 비극적인 결과를 낳는 전쟁과 테러는 2015년의 시작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그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지난 여러 해들과 이제 막 저무는 해에 일어난 어떤 사건들은, 제가 새해를 바라보며 하느님의 은총으로 악을 극복하고 좌절과 무관심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희망을 잃지 말도록 촉구할 힘을 줍니다.

저는 그 가운데 기후 변화에 대처하고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의 안녕을 보존하는 방법을 찾기 위한 제21차 국제연합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에서 세계 지도자들의 회의를 도모한 노력을 떠올려봅니다. 또한 우리는 이 회의 이전에 일어난 세계적 차원의 두 사건들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세계의 지속 가능한 발전 기금 마련을 위한 아디스아바바 정상 회담과 국제연합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2030 의제’의 채택입니다. 이는 2030년까지 모든 인간, 특히 지구상의 가난한 이들이 좀 더 존엄한 삶을 누리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무관심의 종류

인간 사회 안의 무관심의 첫째 형태는 하느님에 대한 무관심으로, 여기에서 이웃과 피조물에 대한 무관심도 파생됩니다. 이 무관심은 상대주의와 허무주의 사상과 결합된 그릇된 인본주의와 실천적 유물론의 최악의 결과입니다.

다른 경우에 무관심은 주변 현실, 특히 가장 멀리 떨어진 현실에 대한 관심 부족으로 드러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묻지도 않고 알려고 하지도 않으며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면서 고통 받는 이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돌보려는 뜻이 전혀 없습니다. 마치 그들에게 일어난 일이 우리와 상관없는 그들만의 책임인 것처럼 여깁니다.

우리가 공동의 집에서 살고 있기에 우리는 그 집의 건강에 대하여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에서 이를 묻고자 하였습니다. 물과 공기의 오염, 무차별적인 삼림 착취, 환경 파괴는 흔히 인간의 타인에 대한 무관심의 결과입니다.

세계화된 무관심에 위협당하는 평화

하느님에 대한 무관심의 소산인 이웃에 대한 무관심은 개인과 공동체 차원에서 무기력과 냉담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불의와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 상황을 조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는 갈등을 야기할 수 있거나 그 어떤 경우든지 불만의 분위기를 조성하여 조만간에 폭력과 불안으로 악화될 위험이 있습니다.

제도적 차원의 무관심, 곧 이웃과 그의 존엄과 기본권과 자유에 대한 무관심이 나타나고 이윤 추구와 쾌락의 문화와 결합되면 궁극적으로 평화를 위협하는 행위와 정치 계획을 조장하고 더 나아가, 때로는 정당화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남벌, 오염, 자연 재해를 촉발하고 전체 공동체를 삶의 터전에서 몰아내어 불안정과 불안을 강요하는, 자연 환경에 대한 무관심은 새로운 형태의 빈곤과 새로운 불의의 상황을 야기하여 흔히 안전과 사회적 평화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무관심에서 자비로 나아가는 회심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와 같이 우리도 자비로워지라고 가르치십니다(루카 6,36 참조). 따라서 우리도 사랑과 연민과 자비와 연대로 참다운 인생의 계획, 상호 관계의 행동 양식을 수립할 것을 요청받습니다. 여기에는 회심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돌로 된 우리 마음을 살로 된 마음으로 바꾸어 주도록 해야 합니다.(에제 36,26 참조)

이 마음은 참다운 연대를 통하여 다른 이들에게 자신을 열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마음은 “가깝든 멀든 그 많은 인간들이 겪는 불행을 보고 막연한 동정심 내지 피상적인 근심을 느끼는 무엇” 이상의 것입니다. 연대는 “공동선에 투신하겠다는 강력하고 항속적인 결의입니다. 우리가 서로 모두에게 책임이 있는 만큼, 만인의 선익과 각 개인의 선익에 투신함”을 뜻합니다. 연민은 형제애에서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관심 극복을 위한 연대와 자비의 문화

도덕적 선이며 사회적 태도인 연대는 개인적 회개의 열매로 교육과 양성을 책임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헌신이 필요합니다. 가정은 사랑과 형제애, 공동생활과 나눔,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의 가치를 배우고 전달하는 첫째 자리입니다. 또한 가정은 어머니들이 자녀들에게 보여주는 소박한 신심의 몸짓에서 시작되는 신앙의 전수에도 탁월한 환경입니다.

학교나 여러 아동 기관과 청소년 기관에서 교육이라는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는 교사와 지도자들은 자신의 책임이 인간의 도덕적, 영적, 사회적 차원에 관련된다는 것을 깨닫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자유, 상호 존중, 연대의 가치는 어린 시절부터 전달될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날마다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데에서 기쁨을 맛보며 더욱 인간답고 형제애 넘치는 사회 건설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데에서 오는 기쁨을 배우게 되기를 바랍니다.

문화계 종사자들과 사회 커뮤니케이션 매체도 교육과 양성의 책임이 있습니다. 특히 정보와 통신 수단에 대한 접근이 더욱 확산된 현대 사회에서 그러합니다. 그들의 과제는 무엇보다도 특정 이익을 따르지 않고 진리에 봉사하는 것입니다. 교육과 커뮤니케이션이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교육은 커뮤니케이션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커뮤니케이션은 인격 형성에 좋든 나쁘든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12월 20일 성베드로광장에서 시리아 평화를 기원하며 삼종기도를 봉헌하고 있다. 【CNS】

연대와 자비와 연민의 문화의 열매인 평화

교회 안팎으로는 수많은 비정부 기구와 자선 단체들이 있습니다. 그 구성원들은 유행병, 재난, 무장 분쟁 가운데에서도 부상자와 병자들을 돌보고 죽은 이들을 묻어주기 위하여 어려움과 위험을 무릅쓰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의 양심에 호소하는 어려운 상황들을 대중에게 알리는 언론인과 사진기자, 그리고 소수 민족과 종교적 소수자, 토착민, 여성과 아동, 가장 취약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권 수호에 헌신하는 이들을 생각합니다.

또한 저의 호소에 기꺼이 호응하여 난민 가정들을 받아들인 개인, 가정, 본당, 수도회, 수도원, 순례지들에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끝으로 저는 연대를 위한 계획을 실천하고자 협력하는 젊은이들, 그리고 자기 도시와 나라, 세상의 다른 지역에서 곤경에 빠진 이웃들을 돕고자 손을 내미는 모든 이를 언급하고 싶습니다. 비록 잘 드러나지 않더라도 이러한 활동에 참여하는 모든 이에게 감사와 격려를 전하고 싶습니다.

자비의 희년 표징 안의 평화

자비의 희년의 정신으로 우리 모두는 우리의 삶 안에서 무관심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깨닫고 우리의 가정, 이웃, 일터를 시작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개선하는 데에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이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또한 국가들도 구체적인 실천을 하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죄수, 이민, 실업자, 병자와 같은 사회의 가장 취약한 이들에 대하여 용기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국가 지도자들은 국경 너머로 시야를 넓혀 다른 민족들과의 관계를 쇄신하여, 모든 이가 국제 공동체의 삶에 실질적으로 참여하고 포함되어 민족들로 이루어진 가정 안에서도 형제애가 실현되도록 하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저는 모든 이에게 다음 세 가지를 당부하고 싶습니다.

물질적 문화적 재화와 사회적 성취만이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정신적 영적 완전성도 파괴하는 분쟁이나 전쟁에 다른 민족들을 끌어들이지 마십시오. 가장 가난한 국가의 국제 부채를 탕감해 주거나 지속가능한 차원에서 관리하십시오. 특정 이념의 지배에 굴하지 말고, 지역 민족들의 가치를 존중하며, 태어나지 않은 생명의 근본적이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그 어떤 경우에도 침해하지 않는 협력 정책을 실행하십시오.

최용택 기자(johncho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