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신나고 힘나는 신앙-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해설] (145)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62) - 수장(首長), 베드로

차동엽 신부
입력일 2015-12-08 수정일 2015-12-08 발행일 2015-12-13 제 2973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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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과 극적인 재신임 후… 주님 권능으로 거듭나
■ 선봉자형 리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예수님은 일개 어부였던 베드로를 첫눈에 리더 감으로 보신듯하다. 그러기에 아직 그를 제자로 부르기 전 첫 번째 상견례에서 그를 “눈여겨보며”(요한 1,42) 그의 장차 이름을 ‘게파’ 곧 ‘반석’이라 작명해 주셨다. 훗날 사람들은 이 단어를 그리스어로 번역하여 ‘베드로’라 부르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어느 면을 좋게 보아주셨을까. 복음서의 여러 단서들을 종합하건대, 앞장서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선봉자’ 정신을 높이 사신듯하다. 진취적 성품이라 할까. 그 방증은 얼마든지 있다. 그는 여러 곳에서 ‘첫 번째’ 인물로 소개되고 있다.

그는 첫 번째로 예수님을 따라나선 사람이었다(마르 1,16-20 참조). 그는 첫 번째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사람이었다(마르 8,29 참조). 그는 열두 제자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 번째로 목격한 사람이었다(루카 24,34 1코린 15,1-9 참조). 그는 성령 강림 후 첫 번째 설교자였다(사도 2,14-36 참조). 그는 첫 번째로 이방인에게 선교를 한 사람이었다(사도 10장 참조). 그는 예루살렘 공의회(사도 15장 참조)에서 첫 번째로 연설(사도 15,7-11 참조)을 한 사람이었다.

첫 번째가 되는 것은 1등이 되는 것과 다르다. 1등이 되는 것은 실력의 문제이지만, 첫 번째가 되는 것은 태도의 문제인 것이다. 첫 번째가 되는 것은 모험이다. 실패, 망신, 사기, 나아가 손가락질을 감수해야 하는 위험천만한 일이다. 이 ‘첫 번째’ 정신이 갈릴래아의 촌부를 예루살렘 언덕과 로마 광장 위에 우뚝 선 복음 선포의 깃발이 되게 한 것이다.

■ 의리의 변주곡

베드로는 의리의 사나이이기도 했다. 그가 예수님께 툭툭 던졌던 말들에서는 ‘의리 논리’가 물씬 묻어난다.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에 이어 빵의 영성을 설파하시자 많은 제자들이 ‘못 알아먹겠다’며 예수님을 떠난 일이 있었다(요한 6,66 참조). 천하의 예수님도 삐치셨을 그때, 예수님께서 “너희도 저들처럼 떠나겠느냐? 너희도 내 강의가 그렇게도 어렵냐?”라고 물으시자, 베드로의 답변이 걸작이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자신에게도 알쏭달쏭했지만, 여하튼 의리 정신으로 알아들은 체 했던 것이다.

카이사리아로 가는 길목에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라는 예수님의 돌발 질문에, 얼떨결에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고백하여 졸지에 교회 수장(首長)으로 선언 받은 직후에 발동한 것도 ‘의리’의 혼이었다. 예수님께서 “내가 그런데 고난을 받아야 되느니라” 하시며 수난을 예고하시자 대뜸 베드로가 “아니 되옵니다”라고 막고 나섰던 것이다(마태 16,22 참조). 이를테면 “저는 주님의 충실한 호위무사! 그런 일일랑 목숨 걸고 막겠습니다”라는 기세였다. 비록 사탄으로 내몰리며 혼쭐은 났지만, 인간적으로는 감동적인 의리의 대화였다 할 것이다.

하지만 ‘의리의 사나이’로서 베드로의 자의식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단 한건의 배반으로 여지없이 무너진다. 수난 직전 “오늘 밤에 너희는 모두 나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마태 26,31)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26,33)라고 답변했을 때만 해도 베드로는 기세등등했다. 베드로의 말은 지금까지 베드로의 인생이 배반을 모르는 삶이었음을 뜻한다. 이는 거짓말도 아니고, 장담도 아닌,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것이 불과 몇 시간 후에 사정없이 허물어질 줄이야. 이윽고, 시험의 시간이 엄습했을 때, 그의 입술에선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마태 26,72)라는 말이 지체 없이 튀어나왔다. 그것도 서슬 퍼런 빌라도의 법정에서가 아니라 단지 심문의 장소에 불과했던 카야파의 집에서였다. 게다가 칼을 든 군인들의 위협이 아닌, 한갓 ‘하녀’(마태 26,69)의 말에 그의 의리는 비참하게 무너졌다. 심지어 “거짓말이라면 천벌이라도 받겠다”(마태 26,74 참조)며 발뺌을 하는 처절한 내면을 드러내면서 허물어졌다.

어차피 의리에 관한 베드로의 자긍심은 허물어져야 했다. 그가 밖으로 뛰쳐나가 자괴감에 쓰러져 울고 있을 때, 잠깐 마주친 예수님의 눈빛에서 베드로는 그분의 결정적 가르침을 읽었다.

“좋다. 베드로! 너 인간성 좋고, 너 의리 있고, 다 좋다. 그러나 네가 나중에 교회를 이끌어가려면, 인간성 하나만 가지고는 안 되느니라. 아무리 자기가 제 인간성을 믿어도, 목 앞에 칼 들어와 봐라. 얘기가 달라질 거다. 그러니 꼭 필요한 것은 너 자신의 의리가 아니라, 나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다. 너는 앞으로 네 이름을 버려라. 필요한 것은 오로지 나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이니라.”

■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부활 직후,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의 배반은 극적으로 용서받는다. 유다는 그 역사적인 배반 이후 자기연민에 매몰되어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의 자비에 마지막 희망을 걸어 마침내 완전한 용서를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세 번에 걸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시는 물음에 뒤이은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16.17)라는 선언으로 ‘초대 교황’으로서 재신임을 받은 사실에서 확인된다.

면목없는 배반과 극적인 재신임! 그 이후 그는 말도, 행동도, 믿음도 180도 바뀐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사도행전으로 넘어가면 베드로는 더 이상 ‘나는’이라는 주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사도 3,6 참조)에서 보이듯이 그에게 권능의 원천은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인 것이다. 그 이름 뒤에 서려 있는 그의 기도 소리는 우리를 위한 깨달음의 소리이기도 하다.

그날 밤, 저는 죽었습니다.

더불어 게파도 베드로도 의리맨도 죽었습니다.

죽음을 알기 전 저는 들쭉날쭉 이었습니다.

때로는 대범했다가(루카 5,11 참조), 때로는 겁약했다가(마르 14,66-72 참조)

때로는 영웅이었다가(마태 16,16), 때로는 사탄이었다가(마태 16,23)

때로는 심복(요한 18,10 참조)이었다가, 때로는 배반자(요한 18,25-27 참조)였다가

때로는 믿음직했다가, 때로는 불안했다가 하더이다.

그날 밤, 저는 죽었습니다.

대신에 두 이름을 얻었습니다.

죽음으로 얻은 새 이름들로 새 세상이 열렸습니다.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하니,

하늘과 땅이 떨고 요지부동의 평화가 깃들었습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양떼를 돌보니,

희생보다 더 큰 희열은 없더이다.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차동엽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