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박물관 문화 순례] 윤을수 라우렌시오 신부 유물 전시관 2

신정숙 수녀(인보성체수도회 새감연구소 소장),사진 인보성체수도회 제공
입력일 2015-12-01 수정일 2015-12-01 발행일 2015-12-06 제 2972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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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자상 모자이크화에 담은 그리운 어머니
성모자상 모자이크화. 현존하는 한국 최초의 모자이크화 한국 성모자상일 가능성이 높다.
배운성이 그린 ‘어머니 초상’. 윤 신부의 어머니(임 골롬바)를 그린 것으로 확실시된다.
윤을수 신부 어머니 임 골롬바.
주논문으로 「조선유교사론」, 부논문으로 「라선사전」을 제출해 1939년 11월 파리 소르본느 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윤을수 신부는 그 후 폴란드의 바르샤바 대학에서 교편을 잡기로 결정됐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일본인 감시의 눈초리를 피해 오스트리아, 독일, 네덜란드, 스페인과 포르투갈, 멀리 아프리카의 카사블랑카까지 피신했다. 이어 1941년 9월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로마에 체류하며 라테라노 교회법 전문학교에서 법률 연구를 했다.

그때 거리와 박물관마다 외국의 성모자상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어머니(임 골롬바, 1939년 7월 선종)를 그리워하면서 지니고 있던 한국의 고유한 성모자상 그림을 바탕으로 외국 작가에게 모자이크를 시켰다. 성모자상 모자이크화(1940년대 작)는 ‘윤을수 라우렌시오 신부 유물 전시관’의 중요 소장품 가운데 하나다.

이 그림 속 여인이 윤 신부의 어머니가 아닌 성모 마리아라는 것은 머리의 후광으로 알 수 있다. 높은 산봉우리들이 어우러진 깊은 산과 흐르는 맑은 계곡물을 배경으로 품위가 깃든 부드럽고 넉넉한 느낌의 한국 어머니가 고운 색동옷을 입은 아이와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은 보는 이들에게 평화와 영원을 떠올리게 한다.

안고 있는 아기는 후광이 없다. 예수님일 수도 있고 우리 각자일 수도 있다. 어쩌면 윤 신부 자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박사학위까지 받고 유학을 마친 젊은 사제가 조국과 가족들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가 위로와 평화를 잃지 않고 명랑하고 쾌활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이미 하늘나라에 드신 어머니와 성모님의 하나 된 사랑 때문이 아니었을까?

크기 16.6㎝×23.1㎝인 이 성모자상은 인보성체수도회 소사 모원 회의실 벽에 걸려있었다고 한다. 윤 신부는 외국 손님이나 귀한 손님이 오면 꼭 그 앞에 모시고 가서 자랑스레 성모자상을 설명하곤 했다. 예쁘고 귀부인 같은 외국의 성모상에 익숙한 수녀들은 그런 윤 신부를 보면서 하찮은 저 그림을 뭘 저렇게 자랑하나 의아해했다. 세월이 한참 지나서야 이 성모자상이 갖는 의미를 제대로 알아듣게 됐다는 것이다.

이 성모자상은 모자이크화로는 현존하는 최초의 한국 성모자상일 가능성이 높다. 윤 신부는 어떻게 서구식 성화에 익숙한 그 시절에 한국의 성모자상을 제작할 의도를 가졌을까? 그것은 윤 신부가 파리로 유학을 떠나기 전부터 맺고 있던 서양화가 겸 외교관이며 우리나라 가톨릭 성미술의 선구자요 한국적인 성화의 개척자인 우석 장발(1901~2001)과의 친분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장발은 장면의 동생으로, 당시 용산신학교 교장이었던 기낭(Guinand) 신부(1872~1944) 사제 수품 은경축을 기념해 김대건 신부 초상을 제작했다. 1925년 7월에 로마의 바티칸에서 거행된 79위의 한국 순교자 첫 시복 식전에 형 장면과 더불어 치명복자(致命福者) 친족 대표로 참석하고 귀국해 서울 명동성당 제대 뒤에 유명한 벽화 ‘14 사도상’을 그렸고, 주위의 요청으로 ‘복녀 김 골룸바와 아녜스 자매’도 그렸다. 오기선 신부의 증언에 따르면 윤 신부는 평생을 두고 이 성녀들을 경모했다.

이 성모자상의 원본 그림을 그린 사람은 한국 미술사에서 유럽 유학생 1호로 꼽히는 배운성(1901~1978)이다. 이런 사실은 윤을수 신부 유품 중에서 발견된 ‘Madonna of Korea by Pai Unsung’이라는 제목의 성모자상이 인쇄된 엽서로 인해 밝혀지게 됐다. 윤 신부는 이 ‘한국의 마돈나’를 다량 인쇄해 엽서로 만들었는데 어느 수녀에게 보낸 엽서의 뒷면에 “화백 배운성은 나와 같이 파리에서 공부한 친구인데 나의 부탁으로 금강산을 배경으로 ‘어머니 순정’을 그린 것”이라는 친필을 남겼다.

윤 신부와 배운성의 만남은 1937년 독일에서 파리로 옮겨 온 배운성이 독일어를 가르치고 있던 파리 근교 부르노 고성의 여학교 기숙사에 윤 신부가 학감으로 부임하면서 시작돼 돈독한 관계를 이어가게 된다. 배운성은 제2차 세계대전의 확전으로 인해 파리 생활을 접고 귀국 후 문예지 「삼천리」(1940.12~1941.1)와 가진 인터뷰에서 윤 신부를 “파리학회에서 역문상을 획득하고 일불협회에서도 상을 탄 유명한 문필가”로 소개한다. 이들의 관계에 대해 가늠해볼 수 있는 또 다른 증언은 ‘춤은 움직이는 사색, 즉 무상(舞想)’이라 정의한 바 있는 한국 신무용의 개척자 조택원(1907~1976)의 자서전에서도 발견된다. 그 또한 1937년 11월 프랑스 파리로 건너갔는데 윤 신부를 배운성이 마련한 다과회에서 만났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가 돈도 없고 문화적인 충격을 받아 무용에 대한 자신감도 약해져 사흘을 굶고 드러누워 있을 때, 윤 신부가 찾아와 사크레 퀘르(Sacré Coeur) 가톨릭 병원으로 데리고 가 3주일 동안 매일 찾아오며 무료로 치료받게 해주었다고 한다.

근대미술 연구자인 김복기는 해방 후 윤 신부와 배운성이 다시 만났으며 윤 신부의 성화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배운성의 붓에 의해 실현됐다고 보고 있다. 김복기는 배운성이 파리 시절 그린, 한복을 입은 비장한 시선의 한국인 초상화의 주인공이 윤 신부라고 단언한다. 또한 묵주와 성경을 든 ‘어머니 초상’(1930년대 후반 작)이 윤 신부의 어머니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배운성의 가족은 가톨릭 신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배운성은 ‘어머니와 아이들’, ‘성호’(1949년 작) 등의 성화도 남겼다.

※문의 031-334-2901~2 인보성체수도회 용인수도원

배운성의 작품인 성모자상 모자이크화의 원본 그림.

신정숙 수녀(인보성체수도회 새감연구소 소장),사진 인보성체수도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