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신앙으로 현대 문화 읽기] 연극 ‘남자는 남자다’

이원희(엘리사벳ㆍ연극배우 겸 작가),
입력일 2015-11-03 수정일 2015-11-03 발행일 2015-11-08 제 2968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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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누군지 모르는 놈이 있다면 그게 나야
연극 ‘남자는 남자다’ 한 장면.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의 희곡 ‘남자는 남자다’는 ‘차디찬 자본주의 세상’에서 공연하기에는 버거운 작품 중의 하나다. 스케일도, 주제도 크고 무거워서 여느 작품보다 몇 배의 돈과 품과 공이 들어 제작자의 치명적인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다. 브레히트는 셰익스피어나 체홉처럼 연극사에 우뚝 솟은 큰 산으로, 20세기 연극에 ‘서사극’이라는 한 획을 그었던 독일의 작가이자 연출가다. 극단 지구연극의 창단취지인 ‘인류역사에 축적된 연극적 성과물의 역사적 현대적 의미를 구현함’에서 브레히트의 작품을 선택한 것 또한 과감한 결단이리라. ‘차디찬 자본주의세상’이란 극단대표 박병수씨의 표현으로 투자된 만큼의 성과가 없는 것은 존재가치 또한 없는 씁쓸하고 고단한 우리네 아픈 현실을 견뎌내고 있음에 대한 고백이며 각오이기도 하다. 이를 모르지 않는 관객의 마음도 더불어 비장해진다.

여기는 황인사. 무대정면에는 얼굴과 한쪽 어깨가 없는 거대한 불상이 가부좌를 틀고 있고, 양쪽의 낡은 판자벽이 문으로도 등장인물의 출입구로도 사용된다. 근사한 연주로 무대가 바뀌면 주인공 갈리가이가 아내에게 부두하역부인 자신의 호주머니 사정에 맞는 작은 생선을 사러 다녀오겠다 한다. 아내가 말한다. “길에서 만나는 군인들을 조심해, 세상에서 제일 못된 놈들이래….” 그런데 시장가는 길에서 갈리가이는 그 못된 놈들을 셋이나 만난다. 원래 넷이었던 셋은 황인사의 시줏돈을 훔쳐 달아나는 길인데 그중 하나인 제레이아 집이 그만 낙오된 거다. 점호시간 전까진 다시 넷이 되어야 길코아 병영의 부대로 돌아갈 수 있다. 셋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그들에게 갈리가이는 딱이었다.

셋은 갈리가이에게 ‘인간적으로 강력히 결코 불쾌하지 않게’ 부탁한다. “코끼리를 선물할게, 점호 때 대답만 크게 해 줘.” 갈리가이는 환호한다. “코끼리만 있으면 오두막에서 비참하게 죽을 일은 없어. 돈만 쥐면 돼. 다른 사람이 되어주는 건 쉬운 일이야.” 욕심이 구름처럼 피어난다.

한편 셋의 계획은 이렇다. 녀석이 코끼리를 팔 때 덮친다. 그리고 말한다. 갈리가이라는 녀석이 코끼리를 훔쳤다더라, 네가 걔라면 총살이지, 그건 군대 코끼리거든. 어, 근데 넌 갈리가이가 아니지, 제레이아 집이잖아? 셋의 마녀사냥에 갈리가이는 꼼짝없이 걸려든다. 내가 갈리가이야? 제레이아 집이야? 드디어 절도죄, 사기죄, 신분모호죄로 총살형이 카운트된다. 하나! 둘!

갈리가이는 울부짖는다. “잠깐! 셋은 세지마! 나는 내가 누군지 모르는 놈이야. 내가 대체 누구야? 그걸 잊어 먹었어. 자기가 누구인지 잊어 먹은 놈을 발견했다면 그게 나야. 그리고 제발 그놈을 한 번만 살려줘!” 팔등신 미인이 나와 섹시한 춤을 추며 서사극적 장치를 방해해도 갈리가이의 속 터지는 외침에는 눈물이 돌지 않을 수 없다.

‘저마다 제 밭으로 달려가는’ 세상. ‘제 눈에 옳게 보이는 대로’하는 사람들. 누가 있어 우리의 눈물을 닦아 줄까. 연출 차태호씨 말대로, 이 세상에서 제정신을 차리고 산다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갈리가이는 자기가 누군지 모른다는 건 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누군지는 안다며 내 속의 나를 결코 모르는 채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문득 걱정이 된다.

이원희(엘리사벳ㆍ연극배우 겸 작가) 뮤지컬 ‘서울할망 정난주’ 극작가이자 배우로서 연극 ‘꽃상여’ ‘안녕 모스크바’ ‘수전노’ ‘유리동물원’ 등에 출연했다.

이원희(엘리사벳ㆍ연극배우 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