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박물관 문화 순례] 호남교회사연구소 문서고 1

이영춘 신부(호남교회사연구소장),사진 호남교회사연구소 제공
입력일 2015-10-20 수정일 2015-10-20 발행일 2015-10-25 제 2966호 13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천주가사 등 전라도 지방 신앙선조 유산 발굴 보존
한국교회 특히 전라도 지역 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는 호남교회사연구소 외부 전경.
전주교구 지역은 한국천주교회 초기부터 신앙선조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때문에 박해 때마다 여러 곳에서 순교자들이 신앙을 증거했고, 순교자들과 신앙선조들이 살았던 삶의 자리가 많은 곳에 흩어져 있다. 그런 곳에는 어김없이 신앙선조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있는 삶의 자취가 남아 있다. 이는 조상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소중한 신앙 보물들이며 후손들에게 전해줄 자랑스러운 유산이다. 이 유산들을 찾아내고 보존해 후손에게 전해주는 일이 현재 우리가 해야 할 어떤 일보다도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천주교회와 관련된 박물관 순례도 바로 그 마음에서 첫 걸음을 떼어야 할 것이다.

호남교회사연구소는 1983년 5월 14일에 설립됐다. 사실은 그보다 훨씬 이전인 1973년부터 천주가사 수집과 연구활동을 하며 교회사 사료 발굴과 정리에 힘쓴 김진소(대건안드레아, 전주교구 원로사제) 신부에 의해 시작된 연구소다. 이 연구소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지방 교회사 특히 전라도 지방의 교회사 정리와 토착화 연구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 목적 하에 교회사 자료 보존과 교구사 간행 및 연구활동, 의식교육 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호남교회사연구소의 산 증인 김진소 신부.
호남교회사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신앙유산들을 소개하기에 앞서 꼭 소개해야 할 분이 있다. 그분은 교회사 사료수집과 연구에 한평생을 바친 김진소 신부다. 김 신부의 삶과 열정은 신앙유산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과 자세를 일깨워 주며, 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유산의 가치와 의미를 더 빛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김 신부는 광주대건신학교 교수 시절 은사들에게서 두 가지 요청을 받았다. 신학교 도서관장인 정양모 신부는 명색이 김대건 신부의 이름을 따라 대건신학대학이라 했는데 교회사에 관한 자료가 하나도 없다며 한탄했다. 성경을 가르치는 서인석 신부는 외국 서적을 한국말로 번역해서 전달하는 성경 교육을 벗어나 한국인의 생각에 맞는 성경교육이 필요하다면서 김 신부에게 토착화에 대한 연구를 권고했다고 한다. 그래서 김 신부는 맨 먼저 사료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이것이 교회사와 인연을 맺은 시작이었다.

그는 자료수집과 옛 공소 답사를 위해 산길과 들길, 자갈길을 마다않고 하루 50여 리는 보통으로 알고 걸어 다녔다. 역사가 깊은 공소는 하나같이 오지에 있었기 때문에, 버스가 가지 않거나 차에서 내려서도 20~30리는 걸어야 하는 곳이 허다했다. 그러다가 놀라운 일을 만났다. 1973년 늦가을 어느 날, 산골 공소의 어떤 가정을 방문했는데, 마침 그 가정이 가을걷이를 끝내고 벽에 도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벽에 바른 초벌 벽지를 보니 붓글씨였다. 그것을 찬찬히 읽어보니 그토록 찾아다니며 얻고자 했던 신앙선조들의 신앙서적이었던 것이다. 그때 참 허전하고 맥이 풀렸다고 한다. “아뿔싸! 하루만 일찍 왔어도 이 책을 얻을 수 있었는데!”

당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교회 분위기는 신앙조상들이 믿었던 신앙을 별 쓸모없게 여기기까지 했으며, 조상들이 보던 책을 케케묵은 것으로 여기던 풍조였으므로 집에 두어 무엇에 쓰겠느냐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느 집에서는 뒷간 휴지로 쓰거나, 엿장수나 고물장수가 오면 엿이나 강냉이와 바꿔 먹곤 했다. 그렇게 공의회 이후 한동안 구교우 중에는 조상들이 보던 책을 신앙에 도움이 안 되는 책이라고 여기는 풍조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김 신부는 불철주야 자료 수집하는 일에 열정을 다했다. 다행히 당시 교우들 중에는 존경의 대상인 신부가 하고 다니는 행색이 하도 초라하고, 땀에 절어 꾀죄죄하게 생긴 꼴에 끼니마저 굶어가며 산길을 걸어 다니는 것이 측은해서인지 신앙 조상의 유물로 남겨둔 책을 선뜻 내놓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 수확이 있는 날에는 뛸 듯이 기뻤고, 그것으로 피로가 풀렸다고 한다. ‘그래! 쉬지 말고 부지런히 구교우촌과 구교우들을 만나 자료를 수집하자!’, ‘자료를 수집해 놓으면 내가 연구하지 못하더라도 누군가 이 자료를 가지고 연구하는 사람이 나오겠지!’ 생각했고 후대 사람들에게 ‘조상들은 이렇게 살았다’는 사실을 전해 주겠다는 신념에서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돌아다녔다고 한다.

어느 공소에서는 “신부님 오셨어” 하는 소리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김 신부가 있는 곳으로 모여들었다. 교우들이 한 방 가득 옹기종기 모였을 때, 한 자매가 다른 여교우 세례명을 부르며 “신부님 오셨으니까 노래 한 자락 혀!” 하는데, 그 자매가 성호를 긋고 소리를 하는 게 바로 박해시대 교우들이 불렀던 ‘천주가사’였다. 그렇게 해서 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던 천주가사를 찾았던 것이다.

신앙선조들의 유산을 수집, 보존하고 연구하는 일에 평생을 바친 김 신부의 공로는 전주교구를 넘어 한국천주교회사에 길이 남을 자랑이다. 그러나 이 일은 김 신부 한 사람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교회 구성원 모두의 의무이자 책임이기에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하는 과업이라 생각한다. 호남교회사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신앙유산을 둘러보며 김진소 신부의 마음과 열정을 읽을 수 있어야만 더 깊이 있는 순례가 될 것이다.

호남교회사연구소는 본래 전시를 목적으로 하는 기관은 아니지만, 교회사 연구자들이나 관심 있는 신자들이 원한다면 소정의 신청 절차를 거쳐 소장 유물을 열람할 수 있다.

※문의 010-6689-2070 호남교회사연구소장 이영춘 신부

호남교회사연구소 내부 문서고 모습. 1973년부터 시작한 천주가사 수집과 연구활동을 통해 교회사 사료 발굴과 정리에 힘쓴 김진소 신부의 땀과 열정이 묻어 있다.

이영춘 신부(호남교회사연구소장),사진 호남교회사연구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