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신나고 힘나는 신앙-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해설] (137)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54) - 긍정의 제자, 안드레아

차동엽 신부
입력일 2015-10-13 수정일 2015-10-13 발행일 2015-10-18 제 2965호 16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12사도 중 가장 먼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
■ 메시아를 만났소!

바야흐로 예수님이 공적 활동을 시작하셨을 때,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복음’ 선포(마르 1,15 참조)에 이어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제자들을 부르신 것이었다. 그 과정은 매우 극적이다. 예수님은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시고, 그들을 부르신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 1,17).

그들은 무엇에 홀린 듯 그물을 버리고 곧바로 예수님을 따라나선다. 예수님은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던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그들도 부르신다. 그들 역시 아버지 제배대오와 삯꾼들을 배에 버려두고 즉시 예수님을 따라나선다(마르 1,20 참조). 이것이 호수에서 일어난 첫 번째 부르심이었다.

그런데, 이상해도 한참 이상하다.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가 특별했기로서니 어찌 한 마디에 생업과 친부를 내팽개치고 따라나설 수 있단 말인가. 멀쩡한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그 의아스러움을 해소해 주는 것이 바로 요한 복음 첫머리의 일단(요한 1,37-41 참조)을 장식하고 있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첫 조우 일화다. 이야기는 요한 세례자로부터 시작된다. 그가 자기 두 제자와 함께 있다가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다 말한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 세례자의 두 제자는 이 말이 “저분이 메시아이시니 이제부터 저분을 따르거라”라는 권고임을 얼른 알아챈다. 그들은 즉시 예수님을 따라간다. 호기심 어린 시선이 자신의 등 뒤를 따르고 있음을 직감한 예수님은 돌아서시어 그들에게 물으신다.

“무엇을 찾느냐?”

예수님은 “왜 나를 따라오느냐?”라고 묻지 않으시고, 이를 구도적 차원의 물음으로 고양시켜 말을 건네신 것이다. 얼마나 운치 있는가. 제자들 답변 역시 걸작이다.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호칭부터 심상치 않다. 공식적인 ‘라삐’가 아닌 예수님을 ‘라삐’로 칭한 것은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라는 암시다.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는 “결례가 안 된다면 수하에서 한 수 배우고 싶습니다” 쯤이 되겠다. 그들이 ‘될 성 부른 나무’임을 예감하신 예수님은 흔쾌히 허락하신다.

“와서 보아라.”

그들은 그날 예수님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요한 1,39)라고 복음서에는 적혀있다. 첫 만남의 시간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그날 사건이 이 두 사람의 뇌리에 짙게 각인되어 있다는 증표다. 얼마나 인상적이었으면.

어쨌든, 요한 세례자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가 바로 안드레아였다. 예수님과 헤어진 뒤 그는 곧장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어쩌면 섣부르달 수 있는 선언을 해 버린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이로써 안드레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가장 먼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한 인물이 되고, 또한 가장 먼저 복음을 전한 사도가 된 셈이다.

그건 그렇고, 이 얼마나 비상한가. 그 짧은 시간에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단박에 알아보다니. 요한 세례자의 귀띔이 있었다 해도 결국은 직접 눈으로 본 바를 고백했다 할 것이니, 안드레아의 영적 명민함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 긍정의 시선

안드레아가 예수님을 대번에 메시아로 알아본 것은 새로운 것에 개방적인 그의 내적 태도의 발로일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영락없이 긍정적 시선의 소유자였다 할 것이다. 이는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사건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파스카 축제일이 가까이 오던 어느 때,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에 계신 예수님께로 군중이 몰려들었다. 어스름한 저녁 무렵 그들의 배고픔을 가엾이 여기신 예수님은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하고 물으셨다.

이는 스스로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있던 예수님이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던지신 물음이었다. 필립보의 답변은 현실적이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요한 6,7).

한 마디로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일 데나리온이 하루 일당에 해당하니 이백 데나리온이면 오늘의 가치로 환산해 천만 원에서 이천만 원 상당의 액수다. 그만한 돈도 없거니와 그 일대에서 그만큼의 빵을 한꺼번에 산다는 것도 아예 불가능한 일임은 자명한 계산! 필립보의 답변에는 하자가 없었다.

헌데, 그 상황에서 안드레아가 생뚱맞게 물어왔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9)

일단 그것들을 먹거리라고 여겨 아이를 데려온 것이 별나다. 웬만하면 “야 이놈아, 그걸 누구 코에 부치겠느냐?”라며 일언지하에 돌려보낼 텐데, 무슨 심산으로 아이를 데려온 것인지! 다음으로, 하나마나한 물음을 해온 것이 미련스럽다.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 물음 같지 않은 물음에 기대어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셨다. 예수님이 차례로 빵과 물고기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 남은 빵조각만도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요한 6,11-13 참조).

이야기 전체를 몇 번이고 새로 읽어 보건대, 분명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실 ‘빌미’를 찾고 계셨다. 마침 그 순간 안드레아가 멋진 ‘꺼리’를 가져왔던 것이다. 안드레아는 큰 집착 없이 ‘가능성’을 물었다. 예수님은 그 실없는 물음 자체를 기쁘게 받아주셨다.

이것이 은총이 내려지는 이치다. 명분의 꼬투리만 보이면 내려주신다. 긍정의 사람 안드레아는 얼떨결에 그 수혜자가 된 것이었다.

■ X자 십자가를 지고

열두 제자 가운데서도 안드레아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예수님의 최측근 4인방에 속했다. 예수님은 성전파괴를 예고하시는 말씀을 이 4인방에게만 들려주셨다(마르 13장 참조). 보다 더 위중한 자리에는 그를 제외한 나머지 3인방을 수행시켰지만, 이는 그가 자격 미달이어서가 아니라 남아서 나머지 여덟 제자들을 통솔할 필요가 있을 때 그랬던 것 같다. 그만큼 그는 예수님의 총애를 받은 사도였다.

역사가 에우세비우스(Eusebius)의 저술 「교회사」에 의하면, 안드레아는 그리스에 가서 전교하다가 파트라스에서 X형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했다고 한다. 죽음 앞에서 그가 바쳤다는 기도는 그가 무엇을 위하여 순교했는지를 눈물겹게 증언해 준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내가 뵈었고 내가 사랑했던 당신, 당신 안에 있는 나를 받으소서. 당신의 영원한 나라에 내 영혼을 받으소서. 아멘.”

이 기도문을 읽는데 문득 눈앞에 아직 세워지지 않은 한 비문(碑文)이 어른거린다.

내가 사랑했던 님이시여!

내가 사랑하는 님이시여!

내가 사랑할 님이시여!

사랑했는데 무엇을 더 청하랴. 사랑하는데 무엇이 더 아쉬우랴. 사랑할 것인데 무엇을 더 희망하랴.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차동엽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