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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주일 특집] 교회사 속 위대한 교황들

이주연 기자
입력일 2015-06-23 수정일 2015-06-23 발행일 2015-06-28 제 2950호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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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정통 지키며 ‘지상의 대리자’로 교회 발전 이끌어
1대 사도 베드로부터 266대 프란치스코 교황까지, 2000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는 교황의 역사는 교회의 역사라 할 수 있다.

베드로 사도의 순교 후 그 후계자로, 전 세계 주교단의 으뜸으로 교황은 각 시대의 영욕 속에서 교회사의 중심에 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세시대처럼, 때로는 어두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도 했지만 두 번의 천 년 기를 넘어서는 시간 속에서 교회 최고 사목자이자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자신의 사명을 수행해 왔다.

신앙인들이 이 같은 교황의 역사에 대해 눈길을 두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니고 있는 신앙의 정통성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교부들 시대에도 교황 연대표가 강조됐는데, 이는 정통 신앙에 머물러 있음을 가리는 중요한 척도였다. 즉 사도좌와 일치하는 공동체는 사도로부터 이어져 오는 가르침에 충실하다는 표지로 받아들여졌다.

한 교회학자의 말처럼, 교황사가 드러내주는 굴절과 훼손 모습은 한편 오늘날 신앙인들에게 교회에 대한 애정과 사랑이 어떠해야 하는지 숙고하게 만들 수 있다.

교황 주일을 맞아 교회 역사 안에서 특별한 발자취를 남긴 교황들을 소개한다.

1999년 12월 24일 성베드로대성당 성년 문을 열고 있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CNS】

사도 성 베드로(64년 경 순교)

교회 건설 ‘반석’된 으뜸 사도

예수 그리스도는 12사도를 뽑아 현세 교회를 이끌고 지도할 권한을 맡겼다. 특히 사도단을 구성할 때 이들 중 시몬에게 ‘반석’이란 뜻을 지닌 ‘베드로’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고 사도들의 으뜸으로 세웠다. 베드로는 12사도 명단 중 항상 첫 자리에 등장했다.

공관복음서에 의하면 베드로는 첫 번째로 부르심을 받았다. “살아있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예수님을 고백한 이도 베드로였다. 예수님은 타보르산의 거룩한 변모 때와 겟세마니 동산에 베드로를 데리고 가셨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세 번의 물음 후 당신의 양떼를 베드로에게 맡겼다. 이처럼 베드로는 사도들의 수석이었다.

초대교회에서도 베드로는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예수 부활 후 사도단을 언급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하고 마티아의 선출 과정도 이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처음 공개 설교를 했고, 유다 원로원에서 사도들 활동을 대변했다.

이처럼 베드로는 초대 교황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사도들이 전해 받은 가르침을 보증하고 그에 따른 교회 공동체 건설에 앞장섰다. 무엇보다 예수님으로부터 하늘나라 열쇠를 받고 지상의 대리자로 세워졌다는 점에서 그 특별함을 되새겨 볼 수 있다.

로마에서 순교한 베드로는 당시 공동 묘지였던 바티칸 언덕에 묻혔고, 성베드로 대성당은 그의 무덤 위에 있다고 세워졌다. 오늘날 교황이 살고 있는 바티칸시국의 기틀이 된 것이다.

성 대 레오 1세(440~461)

로마교회 통치권 기반 확립

교황 중에서 ‘대’(Magnus)라는 칭호를 받은 첫 교황이다.

레오 1세 교황은 위대한 행정가, 신앙의 보존자, 고대 교회 초석을 놓은 인물로 정리된다. 신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서방에서 교황 역할의 모범으로 거론된다.

그는 서로마 제국의 정치·사회적 불안과 함께 여러 이단들로 인해 어려움에 처해 있던 상황에서 신학적·사목적 난제들을 해결했으며 대내적으로는 로마교회 통치권 기반을 확립했다. 대외적으로는 로마의 수호자 역할을 했다.

그의 그리스도 육화에 대한 신학 서한을 가감없이 수용한 칼케돈공의회는 단성설을 단죄하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한 위격에서 혼합되지도 않고 분리되지도 않은 채 결합돼 있음’을 선포했다. 공의회에 모였던 주교들은 교황의 입을 통해서 베드로가 말을 한다고 감탄하였다고 전해진다.

또 그는 173편의 서간과 100여 편의 강론들을 남겼으며 그 가운데서 교황 수위권을 강조했다. 1754년 베네딕토 14세 교황으로부터 ‘교회박사’(Doctor Ecclesiae)로 선포됐다.

성 대 그레고리오 1세(590~604)

탁월한 행정능력 발휘한 ‘하느님의 집정관’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은 베네딕도 수도회 출신으로 서로마 제국의 몰락과 함께 이민족들이 로마를 침략하는 혼란한 시대에 탁월한 능력으로 교회를 중흥시켰다.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 자칭한 그는 실천적이고 활동적인 교황이었다.

신심 깊은 영성가, 탁월한 행정가, 정치가였던 그는 교황청과 방대한 영역의 로마교회 소유 지역에 대한 행정 업무를 재구성, 여기서 나온 자산들을 난민 구제에 사용했다.

성직자들의 생활을 개혁하기 위해 「사목지침서」 4권을 저술했으며 주교와 사제들 영성과 사목에 대한 기초적인 각론을 남겼고 지역마다 제 각각이던 미사 전례곡들과 성무일도에 사용된 시편, 응송, 찬미가들을 전례력에 맞춰 정리한 그레고리오 성가집을 편찬했다.

성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묘비에는 ‘하느님의 집정관’(Consul Dei)이라는 그의 호칭이 적혀 있다. 이 말은 그가 사회와 교회 안에서 수행했던 역할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암브로시오, 예로니모,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서방의 위대한 교회 학자 네 명’ 중 한 명이다.

성 그레고리오 7세(1073~1085)

‘정의’ 바탕으로 교회 개혁 단행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은 11세기 중반부터 12세기에 이르기까지 서구 그리스도교를 개혁한 ‘그레고리오 개혁’의 주인공이다. 교권이 쇠약해져 있던 시대에 교황직에 즉위한 그는 교회 개혁 조치들을 자신의 핵심 과제로 삼고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당시 교회 안에는 성직을 사고파는 성직 매매, 성직자 결혼, 왕과 귀족들이 성직자 임명을 좌지우지 하는 평신도 서임권 등의 악습이 팽배해 있었다. 이미 교황의 고문으로서 전임 교황들을 도와 개혁을 추진했던 그는 성직매매와 성직자 결혼을 금지하는 교령을 발표하면서 적극적인 개혁 작업을 추진했다. 또 교황만이 합법적인 교회의 주인이며 새로운 법령을 제정하고 주교를 폐하거나 복직시킬 권한을 갖는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세속적 권력과의 관계에서도 교황은 황제를 폐위할 자격이 있음을 명백히 밝혔다.

이러한 입장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갈등을 빚게 됐고,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 사건을 가져온 배경이 된다. 그러나 결국 하인리히 4세에 의해 로마를 떠나 살레르노에 피신, 그곳에서 사망했던 그는 “나는 정의를 사랑했고 부정을 미워했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정의’를 향한 깊은 열성을 보였던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은 ‘순수하고 자유로운’ 교회를 이상으로 삼았다. 생전에 이루지 못한 개혁 작업들을 후임 교황들이 이어나가면서 그의 개혁 의지는 계승되었고 이는 서방 그리스도교 세계를 형성하는 바탕이 됐다.

성 요한 23세(1958~1963)

공의회 통해 교회 ‘현대화’ 이끌어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막을 통해 교회를 현대화시킨 교황이다.

1962년 10월 11일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막을 알리는 전 세계 2500명 주교들의 행렬은 현대교회의 새로운 탄생을 알리는 장면이었다. 개막 연설에서 요한 23세 교황은 “주요 교리를 다시 확인하거나 오류와 이단을 단죄하기 위해 열렸던 이전 공의회들과 달리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자비의 약으로 자신을 고치고 자신의 가르침을 제시하면서 현대 세계 요구에 응답하기 위한 것”이라고 공의회의 목적을 밝혔다. ‘아조르나멘토’(Aggiornamento, ‘현대화’ 또는 ‘쇄신과 적응’ 의미)라는 표어대로 공의회 개최의 결정은 단지 외적인 현대 세계의 적응을 넘어 온전한 의식의 개혁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77세 고령의 나이에 교황직에 선출된 그는 그야말로 전향적으로 세상을 향해 교회를 적극 개방하였으며, 스스로는 공장, 양로원, 감옥을 찾아다니며 평범한 이들과 어울렸다. 교황직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면서 지나친 교황중심적 경향을 완화하고 교구장 주교들에게는 늘 변화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교의와 상관없이 세상과의 대화를 원했던 그는 그리스도교 일치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교 일치 사무국을 신설하였으며, 추기경단 규모를 확대하면서 유럽 중심 교회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노력을 보였다.

미국 일간지 ‘더 타임스’는 그가 선종 했을 때 “세상 사람들 마음을 사로잡은 흔치 않은 교황이었다”고 논평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1978~2005)

공산주의 붕괴 영향 준 ‘평화의 사도’

하드리아노 6세(1522~1523) 교황 이후 456년 만에 비 이탈리아인 교황이자 최초의 슬라브인 교황으로 선출 당시부터 주목을 받았다.

‘교회의 보편적인 목자’로서 전임 교황을 따라 즉위식을 마다하고 소박하게 취임식을 거행했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평화의 사도’, ‘행동하는 교황’이라 불리며 1979년부터 2004년까지 총 104번의 사도적 순례를 펼쳤다. 5개 대륙 190만km 거리였다. 또 1338명을 시복하도록 명하였으며 147회 시복식을 주례했고 51회 시성식으로 482명을 성인 반열에 올렸다. 그의 발자취 중에서 주목할 것은 공산주의 붕괴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는 것이다. 1978년 첫 폴란드 방문 당시 보인 민중들 반응은 공산주의 권위의 실추를 드러내면서 연쇄적으로 소비에트 체재에 영향을 줬다는 평가다.

그는 한편 재위 기간 중에 많은 문헌을 발표했다. 첫 회칙 「인간의 구원자」를 비롯해 그의 문헌들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 구현에 바탕을 두면서 시대가 요청하는 진리를 담아냈다.

한국교회와도 인연이 깊다. 한국을 방문한 최초의 교황이다. 1984년 103위 시성식을 거행과 1989년 제44차 세계성체대회 참석차 두 차례 방문했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