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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 특별기획] ‘가정사목과 복음화’ 8. 혼전 동거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15-06-16 수정일 2015-06-16 발행일 2015-06-21 제 2949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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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고 결혼한다” 
가정과 결혼 가치보다 현실적 셈법부터 따져
이미 만연했지만 여전히 내놓고 말하기는 금기시된 ‘낙태’처럼, 우리 사회 분위기 안에서 ‘혼전 동거’는 또래들끼리라도 공공연하게 밝히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많은 어른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동거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상당히 ‘현실’인 듯하다.

내년이면 서른이 되는 김인수(가명)씨는 사귄지 2년 된 동갑내기 여자친구와 올초부터 서울의 원룸에서 동거에 들어갔다. 지방대학 출신으로, 직장 초년생인 김씨가 이미 사회생활을 한지 4년째인 여자친구와 거주 공간을 함께 사용하는 것은 좋아하는 이성과의 달콤한 생활을 넘어 여러 가지 현실적인 편리를 제공한다고 느꼈다.

두 사람 모두 주변 사람들에게 동거 사실을 알리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자기 주위에서 이처럼 혼인을 전제로 하든 안하든 법적 절차 없이 동거하고 있는 이들이 심심찮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김씨는 특히 대학 후배들 사이에서는 지방에서 올라온 커플들끼리 함께 사는 이야기들이 별로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점점 일반화되는 추세

최근의 각종 통계조사는 이같은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특히 이 조사들은 동거의 실제 사례를 집계한 것은 아니지만, 이같은 실제를 반영하는 인식 조사 결과를 전해준다.

가장 최근의 관련 통계를 보자. 여성가족부와 통계청이 지난 4월 28일 발표한 ‘2015 청소년 통계’에 따르면, 지난 해 13~24세 청소년들의 절반 이상, 즉 56.8%는 “남녀가 결혼하지 않아도 함께 살 수 있다”고 답했다. 특히 10대보다는 20대가 이같은 인식이 더 강해 20~24세 연령층은 무려 60.1%가 혼전 동거에 대해 관대한 입장이었다.

결혼하지 않고도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견해에 대한 응답은 4명 중 1명(26.4%)이 찬성, 반대는 73.6%로 나타났다. 마찬가지로 20대에서 더 개방적인 태도가 나타나 28.5%가 찬성, 71.5%가 반대 입장을 표시했다.

청소년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 전 연령층에서도 정도는 약하지만 동거에 대한 변화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지난해 실시된 한 보고서에 의하면 절반가량의 국민들이 혼전 동거에 대해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해 2월 3일 발표한 ‘가구 및 가족의 변동과 정책적 대응방안 연구’ 보고서에 의하면, 2013년 7~8월 전국 20~65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가족 가치관 인식 및 태도 조사’를 진행한 결과 절반가량(46.1%)이 “결혼하지 않아도 남녀가 함께 살 수 있다”고 응답했다.

전체적으로는 동거에 반대하는 비율이 53.6%로 약간 높았지만,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20대와 30대에서는 동거에 찬성하는 비율이 53.1, 59.2%로 절반을 훌쩍 넘었다. 50대와 60대에서는 각각 63.1%, 69.1%가 반대하는 입장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통계 수치를 통해 볼 때, 아직까지 사회적으로는 공식적인 법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찬성한다는 입장이 절반을 차지하고 특히 젊은 층일수록 지지도가 높다는 점을 고려하면 앞으로 동거가 더욱 확산되고 일반화될 것이라는 추정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실제로 2013년에 한국갤럽이 전국 만 19세이상 남녀 1217명을 대상으로 한 전화 설문조사에서는 혼전 동거에 대해 반대가 55%, 찬성이 37%로 나타났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불과 수년 사이에 동거에 대한 인식 자체가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목적 도전들 중 하나

지난해 세계주교대의원회의(주교시노드) 제3차 임시총회 최종 보고서 ‘복음화의 맥락에서 본 가정에 대한 사목적 도전들’은 현대 사회의 흐름 중 하나인 동거에 대해 조심스럽게 그 현실을 인정하고, (신중한 식별이 필요하지만) 동거 현상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긍정적 요인들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보고서는 동시에 그러한 현상들 안에서 “아직 그리스도교의 메시지에 상응하지 않거나 이미 그 메시지를 벗어난 요소들을 지적해야 할 것”이라며 동거의 부정적인 영향과 결과를 우려하고 있다.

보고서는 의안집을 인용하면서 구체적으로 오늘날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시험 삼아 결합하는 남녀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의안집, 81항)는 사실을 지적했다. (42항 참조) 보고서는 또한 “동거는 미래의 결혼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제도적인 관계를 맺으려는 의도 없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매우 흔하다”(27항)고 지적했다.

주교시노드에서 각국 주교들은 이러한 현실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보고했다. 시노드에 참석했던 강우일 주교(전 주교회의 의장, 제주교구장)는 가톨릭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특히 유럽이나 미주 지역에서 온 주교들은, 많은 젊은이들이, 평생을 하나의 배우자와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현실적으로 힘든 일이고 자신은 그렇게 살 자신이 없다고 말한다고 전했다. 이들은 혼인을 반드시 해야 할 필요성이나 책임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동거 생활로 만족한다고 주교들은 전했다. 그리고 이러한 풍조가 확산되고 있는 것은 주로 “유럽과 북미 대륙의 개인주의적 사고방식과 물질주의적 가치관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결과라고 평가했다.

개인주의·물질주의 영향

동거를 찬성하는 몇 가지 이유 중의 하나는 “살아보고 결혼한다”는 주장이다. 직장인 문모(32)씨는 “최근 이혼율이 눈에 띄게 높아지는 것을 보면서, 일정 기간 살아보고 결혼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동거라고 해서 무조건 색안경을 끼고 볼 것이 아니다”라며 “나름대로 상대방에게 진지하고 장차 결혼을 전제로 하고 살아보는 것을 무조건 비난할 것만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이들은 이같은 추세를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일이라고 단언한다. 직장인 이모(28·여)씨는 “아무리 결혼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도 동거는 대부분 순간적인 결정이고 이기적이거나 무책임한 일이기 쉽다”며 “조금 살아보고 아니다 싶으면 쿨하게 갈라지면 끝이라는 쉬운 생각은 결혼과 가정의 소중함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동거가 늘어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사회적 조건으로 인해 혼인을 할 수 없는 경우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주교시노드 보고서에서도 이 점이 매우 명확하게 지적되고 있다. 보고서는 42항에서 많은 동거 사례들이 “흔히 제도와 결정적 투신을 일반적으로 반대하는 사고 방식 때문에 선택된다”면서도 “확실한 삶, 즉 고정된 일자리와 임금에 대한 기다림 때문에 선택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많은 나라들에서 늘어나고 있는 사실혼이 “가정과 혼인의 가치에 대한 거부로 인한 것만이 아니라 사회적 조건들로 인하여 혼인하는 것이 사치로 여겨지고 그래서 물질적 빈곤 때문에 사실혼의 상태로 살게 되는” 현상에 대해서 우려했다.

가정과 관련된 다른 많은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가르침, 복음적 삶과 현실은 종종 심한 괴리를 보인다. 개인주의와 세속주의, 물질주의와 쾌락주의, 그리고 넘기 어려운 현실적인 사회적 조건들이 모두 오늘날 혼전 동거가 확산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주교시노드 보고서는 혼전 동거가 확산되고 있는 현실을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해서, 지속적인 사목적 고민을 하고 있다.

보고서는 이러한 모든 상황들이 “복음에 비추어 본 충만한 혼인과 가정을 향해 가는 기회로 변화시키도록 해야 할 것”이라는 원칙적인 입장을 천명하면서, ‘인내와 섬세함’을 가질 것을 권고한다. 그리고 “가정 복음화의 주체인 진정한 그리스도교 가정들의 매력적인 증언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