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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위 성인약전] 성 오매트르 오신부 / 김옥희

입력일 2015-04-06 수정일 2015-04-06 발행일 1985-05-26 제 1457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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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나빠 본당신부가 신학교추천 꺼리기도
오(吳)오매트르 신부의 원명(原名)은 삐에르 오매트르(Pierre Aumaitre)이고 한국성은 오(吳)씨이다. 그는 1837년 4월 8일 앙굴렘(Angouleme)교구내 애제크(Aizecq)라는 조그만 시골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부모님들은 모두 훌륭한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로서 조그만 농지를 경작하며 신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꾸려갔는데、모두 5남매를 키우고 있었다.

오매트르는 어려서 성실은 하였지만 공부성적이 뛰어나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가 신학교에 입학하고자 할 때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오매트르가 워낙 부지런하면서도 열심한 소년임을 알게된 본당신부는 그를 신학교에 보내고자 라띤어를 가르치게 되었다. 그러던중 본당신부가 바뀌게 되어 오매트르는 다시 한번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새로 부임한 본당신부는 오매트르를 신학교에 추천하기를 꺼렸던 것이다. 하지만 오매트르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매일 새벽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평신도에게 라띤어를 배우러 다녔다. 이에 감탄한 본당신부는 리쉬몽(Richemont)성모 소신학교 중등과 2학년에 입학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이때가 1852년 10월이었고 그의 나이는 15세였는데 이곳에서 그는 5년을 지냈다.

소신학교에 입학한 오매트르는 그의 특유의 성실함으로 공부의 부족함을 극복할 뿐만 아니라 우등생이 되기까지 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1857년 10월 앙굴렘(Angouleme)에 있는 대신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이 대신학교에서 그는 아주 훌륭한 순명정신을 나타내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하였지만 바로 이 대신 학교 시절부터 그는 선교신부가 되기를 갈망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그의 고해신부에게 상담하니、고해신부가 직접 주선하여 1859년에는 오매트르가 소속교구를 떠나 선교신부가 되어도 좋다는 주교의 허락을 받게됐다.

그리하여 오매트르는 1859년 8월 18일 소품자(小品者)로서「빠리」외방전교회의 신학교에 입학하여 1862년 6월 14일 선교신부로서 사제서품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전교지가 조선임을 알게 되었다. 이미 조선에서는 심한 박해와 순교로 인해 성직자가 가장 필요로 하는 곳이며 가장 선교하기에 어렵고 위험한곳인 줄 익히 알면서 그는 지체하지 않고 조선입국을 서둘러 사제서품을 받던 그해 8월 18일 조선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박해로 조선으로의 입국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는 1년 가까이나 지난 1863년 6월 23일에 패낭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던 두조선인 신학생을 데리고 중국어선으로 연평바다를 거쳐 비교적 무사히 조선땅을 밟게되었다.

조선에 입국한 오매트르신부는 우선 1개월동안 베르뇌(Berneux)장주교와 함께 서울에서 지낸후 샘골(泉谷里)로 자리를 옮겨 조선말을 익히게 되었다. 그후 1864년 9월에는 경기도지역의 한 구역을 맡아 사목할수 있게 되었다. 이때의 오매트르신부의 전교활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편지를 장주교가 썼다고 한다.

『수련생같은 이 키작은 신부는 조그만 기적들을 행합니다. 그 착한 마음씨에다 온갖 정력까지 다 쏟아서 교우들을 훌륭하게 돌볼 뿐만아니라 신자들에게 성체께 대한 신심과 마리아께 대한 신심을 대단히 잘가르치고 있답니다.』

입국한지 2년남짓、이와같이 본격적인 전교활동을 시작할 무렵 교우들에 대한 박해소문이 나돌고、장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할때인 1866년 당시 오매트르신부는 수원지방 새암골에 있었다. 여기서 오매트르신부는 안주교를 만나기 위해 일단 교우들을 진정시키고 격려하면서 미사예절용 물건들을 모두 치워버리고 안주교가 있는 신리마을로 갔다. 이것은 오매트르 신부가 교우들에게 더 큰 피해가 없도록 하기위해 자수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하여 안주교의 집에 있던 포졸들은 안주교뿐만 아니라 다른 신부들도 체포할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포졸들은 안주교를 위시하여 민위앵신부와 오매트르신부를 홍주옥에 일단 끌고 갔다가 다시 서울로 압송하여 투옥시켰다.

문초를 받는동안 주리트림 등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고백하였으므로 결국 오매트르 신부를 포함한 세선교사들은 모두 사형선고를 받고 2백 50리나 떨어진 충청도 수영(水營)의 갈매못 사형장으로 끌려가 1866년 3월 30일 참수 치명하니 바로 그날이 예수수난일로 그때가 예수께서 운명하신 시간이라고 전하여 진다. 그때 그의 나이 29세였다.

그후 교우들이 완전히 벗겨진 순교자들의 시체들을 3일후에야 거두어 정성껏 장례를 치루었는데 이상하게도 짐승들이 해친 흔적이나 부패의 흔적이 전혀없고、세분의 선교사 모두가 아름다우 모습을 띄고 있었음을 목격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오매트르신부의 유해는 현재 서울 명동대성당에 안치되어 있으며、그가 쓰던 시계와 지갑은「빠리」외방전교회 신학교의 순교자 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

성 오매트르신부의 생애는 완전히 하느님께 순명하는 생활이었고 선교사로서 자신의 본분을 철저히 수행하다가 그의 젊음을 피의 제사로 봉헌한 생애였다고 그의 전기의 서술자들은 말하고있다.

<修女ㆍ한국순교복자회ㆍ오륜대순교자 기념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