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현대의 봉헌생활 (3) 현대사회와 교회 안의 축성생활의 의미와 가치

정대현 신부(미리내 천주성삼 성직 수도회)
입력일 2015-03-10 수정일 2015-03-10 발행일 2015-03-15 제 2935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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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 선익·교회 쇄신 이바지함으로써 세상과 교회 성화
‘그리스도를 따름’이라는 근본적인 원천 지향
답습 아닌 시대에 맞는 카리스마 재해석으로
물질주의 극복, ‘인간답게’ 사는 법 제시해야
현대의 축성생활: 진보인가 퇴보인가

오늘날까지 축성생활의 실재는 다양한 제도상의 유형들과 각 회의 고유한 사도직을 통하여 우리에게 제시되어 왔다. 이러한 공동체들의 형태들 중 몇몇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생활양식이 지속되어 왔고 그중 하나는 수도생활이라는 대표성을 가지고 축성생활회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반면에 어떤 형태는 역사의 흐름 안에서 쇠퇴하거나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실재 안에서 축성생활을 바라보는 두 가지 그릇된 시각이 존재한다. 하나는 초 세기에 그 자체로 이미 완성되어져 온 그리스도교 공동체 생활이 역사의 흐름 안에서 예전의 그것을 계속 답습하는 과정에 있다는 시각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사도행전에서 제시되는 초기 예루살렘 공동체가 가졌던 이상적이고 완벽했던 삶의 형태를 제시한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 안에서 축성생활의 역사를 본다면 우리는 구시대의 ‘유물’만을 취하게 되고 새롭게 설립되는 회들은 점진적으로 쇠퇴해가는 모습들만 보게 될 것이다.

또 다른 하나의 시각은 축성생활이 점차적으로 진보하고 발전해 왔다는 주장이다. 축성생활을 규정짓는 서원과 생활형태들이 신학적, 법률적 토대를 이루어 왔고 그로 인해 전체 축성생활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입장을 표명하지만 이러한 시각 안에서는 고대시대부터 존재해왔던 수도승회나 중세의 탁발수도회보다 근대 이후의 활동수도회나 현대의 재속회가 더욱 발전된 형태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날 발생하는 신앙의 위기, 선교와 복음화의 위기, 성소의 위기와 시대적 표징을 찾는 질문에 근본적인 해답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축성생활의 역사는 ‘순환적인 연속성’을 가진다. 오늘날의 축성생활은 하나의 전통과도 같은 삶의 연속이며 이전 축성생활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는 과거의 향수나 고고학적 가치에 의미를 두고 그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마치 출판된 책을 시대가 지남에 따라 어법에 맞게 새로 개정하듯이 각 시대에 따라 제시된 축성생활양식들을 새롭게 갱신하기 위하여 그 원천을 지표면 위로 뿜어 올리게 하는 과정이 바로 축성생활의 역사이며 축성생활의 쇄신이다.

시대적 표징을 찾아서

현대에는 다양한 형태들로 제시되는 수많은 축성생활회들이 ‘그리스도를 따름’이라는 근본적인 원천을 지향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 지향점을 목적으로 설립된 다양한 축성생활회들의 역사는 ‘시대적 표징을 식별하는’ 역사였다. 역사 안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구원사업과 당신의 완전한 사랑의 독자성을 드러내는 식별의 노력이었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새로운 형태의 축성생활의 등장은 언제나 그 시대적 변화의 요구에 대한 ‘응답’이었다는 점이다. 초 세기부터 이어져 왔던 독신과 금욕생활은 자기 자신을 위해 있지 않고 공동의 선익과 구원을 위한 응답이었으며 사막에서 홀로 혹은 무리를 지어 은수생활(Eremitae)을 하던 사람들은 박해가 끝난 후 세속적 평화에 안주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신앙의 실천성-순교와도 같은-에 응답하고자 하였다.

성 베네딕토 규칙서를 따라 정주생활을 하던 수도승원의 형태는 홀로 독수하던 ‘떠돌이 수도승들’(Sarabaitarum)의 악습에 대한 사회와 교회문제의 응답이었고 새로운 이민족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삶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하였었다.

또한 탁발수도회들(Mendicantes)의 공동체적 가난과 순회설교는 개인적으로는 가난하지만 공동체적으로는 부유한 기존 생활양식의 어두운 면을 향한 복음적 삶의 응답이었다.

신대륙의 발견, 프로테스탄트와 인문주의의 영향으로 학문과 설교, 사목과 같은 사도직의 필요성에 적절한 응답을 한 성직자회(Clerici Regulari), 그리고 가난한 이들과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자선사업과 교육 및 선교는 프랑스혁명 이후 위축된 교회의 복음적 봉사를 향한 ‘단순서원 수도회들’(Congregatio Religiosa)의 응답이었다.

기존의 축성생활 형태가 ‘세상 밖’에 존재하는 ‘수도회’였다면 ‘세상 안’에서 활동하는 ‘재속회’(Instituta Saecularia)들의 존재는 공동생활과 수도서원, 회의 사도직, 장상의 손안에 머물러있는 수도자들보다 더욱 유연하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은 교회의 위기를 가져오는 세속주의에 맞서고 카리스마적인 공동선익을 제공한다. 또한 축성생활회는 아니지만 역사 안에서 회의 유대를 통하여 이 시대의 복음적 봉사를 보여주는 ‘사도생활단’(Societas Vitae Apostolicae)이 존재한다.

현대사회에서도 축성생활회는 각자의 카리스마를 현시대에 맞게 재해석하고 모든 구성원이 타오르는 열정으로 교회를 위한 사명에 투신해야 할 것이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교회와 축성생활의 위기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제기한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극심한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물질만능의 결과론적 우선주의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 살아야 다른 인간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가’라는 경쟁심리의 결과로 자신의 삶을 평가하는 풍조가 만연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 앞에서 교회는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현대사회에 맞게 해석하고 방법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헌장이 반포된 지 50년이 지난 오늘날, 교회의 쇄신과 다양한 문화적응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데 많은 성과를 거둔 것은 사실이나, 빠르게 변화하는 패러다임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부분도 존재한다. 이는 신앙의 위기를 개인들이 극복해야 할 의지의 문제로만 돌리며 교회의 바깥에 대한 무관심과 신학적 자기도취에 빠져있는 점 또한 충분히 성찰하고 반성해야 될 부분이다.

이러한 성찰과 반성은 역사의 흐름 안에서 축성생활이 그 선구적 역할을 해 왔다. 공동의 선익과 교회의 쇄신에 이바지함으로써 세상과 교회의 성화를 담당하였다. 하지만 반대로 축성생활회들이 그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 교회의 세속화는 더욱 가속되었고 그 사회 안의 우상화는 더욱 심해졌다.

현대의 축성생활도 분명히 위기에 봉착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영성생활이 축소된 일련의 활동주의나, 규율의 약화로 정체성의 혼란을 들 수 있다. 또한 쇄신이라는 기치 아래 과거의 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과정 등 이 모든 것은 축성생활회의 성소자 감소로 이어져 왔다.

교회 내의 축성생활에 대한 이해부족 또한 위기의 한 측면을 가져온다. 특히 교구 성직자들 안에서 수도자들을 교계제도 안에 억지로 끼워 넣으려는 시도는 현대 교회 안에서 적절하지 않으며 시대의 요청에 따른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가 탄생할 때 그것의 감독과 보호를 위해서는 신학적 식별의 연구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신자들 또한 축성생활회원들이 자신들과 동떨어져 있는 부류가 아닌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향한 지체들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축성생활회의 몰이해는 누구보다 축성생활을 사는 본인들에게 있는 정체성의 부재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초기 양성기간 안에서만 마무리 짓는 것이 아니라 평생토록 하느님의 부르심을 식별하고 그에 응답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교육하고 양성받아야 한다.

현재를 살아가는 축성생활의 의미와 가치

‘축성생활’(Vita Consecrata)이라는 용어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전에는 ‘수도생활’이라는 단어만으로 공적수도서원을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봉헌된 이들의 삶을 지칭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수도회, 재속회, 동정녀회, 은수자회라는 다양한 유형적 측면과 더불어 복음적 권고의 서원과 거룩한 결연을 통하여 하느님으로부터 축성된 이들이라는 보다 더 깊은 신학적 측면을 가진다. 이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제시된 복음적 권고를 의무로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며 비록 교계제도와 관련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 ‘교회 안에’ 있으면서 ‘교회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성령께서 훨씬 더 위대한 일을 하시려고 여러분을 파견하실 그 미래로 눈을 돌리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그리스도를 열정적으로 기다리는 삶이 되게 하십시오.”(봉헌생활 110항)

교종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봉헌생활’ 결론 부분에서 하신 이 말씀은 축성생활을 사는 이들이 현대사회와 교회 안에서 어떠한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려주고 있다. 축성생활회들이 과거의 영광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 존재의 의미가 규율에 따른 삶 자체만으로 국한시키게 되고 세상과 교회의 삶을 정체시키는 존재로 전락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이며, 오히려 과거의 영광이란 축성생활회 설립 초기에 가져왔던 무한한 ‘열정’을 공동체 구성원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어’(사도행전 2,32-47) 현재를 살아가는 삶이 바로 ‘교회의 생명과 성덕에 이바지하는 것’(교회헌장 44)이라고 권고한다.

축성생활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의 정체성에 대하여 생각할 때 무엇보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이라는 근본적인 자각이 밑바탕 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모든 신앙인이 가져야 하는 출발점이며 원천이기 때문이다. 이 출발점에서부터 자신이 속한 회의 카리스마를 현시대에 맞갖게 재해석하고 모든 구성원이 타오르는 기쁨의 열정으로 교회를 위한 사명에 투신하여야 할 것이다.

정대현 신부(미리내 천주성삼 성직 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