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현대 그리스도교 미술 산책] (25) 엘리자베스 프링크와 ‘걷고 계신 성모님 Walking Madonna’

최정선(미술사학자)
입력일 2015-02-03 수정일 2015-02-03 발행일 2015-02-08 제 2931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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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으로 나서 소명 다하시는 성모님
온갖 풍파 겪어낸 듯 수척하고 여윈 표정 이색적
현대적 감성의 종교 이미지 형상화 시도 돋보여
엘리자베스 프링크.
조각가이자 판화가였던 엘리자베스 프링크(Elisabeth Frink, 1930~1993)는 영국 서포크(Suffolk)에서 태어나 길퍼드(Guildford)와 첼시(Chelsea) 미술학교에서 공부했다. 전후(戰後) 영국 조각가 그룹에 속해 있었던 프링크는 인간과 더불어 말과 개, 새 같은 동물들을 주제로 삼아 작품을 제작했다. 인간 형상 중에서는 여성 이미지보다는 남성 누드를 주로 선택했다. 그녀의 작품들은 전 세계 개인 컬렉션과 공공기관에 소장되었는데 특히 대중적인 공간과 건물 공간에 할애됐다. 많은 드로잉과 판화작품들이 있었다고 해도 그녀를 세상에 널리 알린 것은 역시 청동으로 주조된 야외 조각이었다. 예컨대 조각의 주조를 이루는 남성 인물들은 마스크 같은 얼굴과 통상 새가슴이라고 말할 정도의 기형적인 몸통과 빈약한 사지를 지녔다. 이것은 그녀의 조각형태가 분명 자연의 이미지에서 왔으나 표현주의적인 결을 지님으로써 작품이 프링크 자신만의 감성을 소화한 이미지로 재창조되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프링크는 현대적인 감성을 지닌 종교적 이미지를 형상화하는데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아왔고 이 때문에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대성당들과 새로운 교회와 성당들로부터 다수 조각을 주문받았다. 코번트리 대성당(Coventry Cathedral)과 리버플 메트로폴리탄 대성당(Liverpool Metropolitan Cathedral), 벨파스트(Belfast)에 있는 성 베르나데트 성당(St Bernadette Catholic Church)의 주문들은 이를 뒷받침해 준다. 특히 리버플 대성당의 ‘부활한 예수’(1993)는 그녀의 마지막 유작으로 알려져 있다. 프링크의 공식적인 자서전 작가인 스테판 가디너(Stephen Gardiner)는 이 마지막 조각에 감탄하며 그녀의 작품을 ‘예술가의 마음과 정신이 생생하게 재현된 거울’이라고 할 만큼 찬사를 보냈다.
영국 솔즈베리 대성당(Salisbury Cathedral)에 있는 엘리자베스 프링크(Elisabeth Frink, 1930~1993)의 작품 ‘걷고 계신 성모님’(Walking Madonna), 1981, 청동.

우리는 성모님을 재현한 조각과 그림들에서 앳된 모습의 소녀를, 때로는 완숙하면서도 수려한 미모의 여인상을 자주 접하게 된다. 이때 그녀는 부드러운 옷자락을 늘어뜨리고 축복과 위엄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또한 공경을 위해 제작된 성모상 대부분은 앉아 있거나 때로 서 있으면서 대단히 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따라서 활동하는 성모님의 모습은 쉽게 접할 수 있지 않았다. 기껏해야 우리는 베들레헴이나 이집트로 가는 길에 나귀를 탄 성모님을 보거나 성전에 예수님을 봉헌하시는 모습, 또는 십자가 아래 오열하는 모습을 보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오늘 소개할 조각은 프링크가 그녀의 작업에서 흔하게 선택하지 않는 여성 인물형상이면서 종교적인 에피소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낯선 성모님이다.

낭만주의 화가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1776~1837)의 그림 속에 등장할 만큼 유명한 솔즈베리 대성당(Salisbury Cathedral, 1220~1258)은 잉글랜드 남부의 영국이 자랑하는 대성당이다.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이 대성당은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곳으로 정식명칭은 ‘Cathedral of the Blessed Virgin Mary’이다. 이 대성당의 잔디마당에는 프링크가 1981년 제작한 ‘걷고 계신 성모님’(Walking Madonna)이 모셔져 있다. 예쁘고 어린 소녀도, 우아한 여인의 모습도 아닌 중년의 이 성모님은 우리가 무릎 꿇고 기도하기 위해 성당 안팎에서 보았던 그러한 성모님과는 꽤 차이가 있다. 게다가 성모님의 모습은 위엄을 갖춘 신의 어머니도, ‘하늘의 모후’라는 칭호도 어울리지 않는다. 다만 온갖 세상의 풍파를 겪어내느라 다소 수척하고 여윈 의미심장한 표정의 어머니일 뿐이다. 그녀는 대성당의 고요로부터 성큼성큼 걸어 나와 도시의 분주함과 소음 속으로, 대성당을 향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대성당을 뒤로하고 세상으로 나서고 있다.

솔즈베리에서 필자는 엄마 오리를 따라 걷는 아기 오리들처럼 성모님 뒤를 따라 걷는 포즈로 사진 촬영을 하는 방문자들을 본 적이 있다. 이 재기 넘치는 방문자들 때문에 불현듯 솔즈베리의 성모님이 우리에게 전하는 감동을 고스란히 느낀 기억이 있다. 교회의 어머니, 그분은 교회 안에 머무르지 않으시고 검소한 차림새로 자신의 소명을 다하시기 위해 대성당을 나서시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자신이 사랑하는 제자들을 친히 해가 뜨는 곳에서 해가 지는 곳까지 보내셨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제 모친이신 교회가 다시 세상 속으로 걸어 나가는 모습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해 본다.

최정선씨는 숙명여자대학교에서 서양미술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숙명여대에 출강 중이며, 부천 소명여자고등학교 역사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최정선(미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