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 1. 교회와 가난

서상덕 기자,김근영 기자
입력일 2015-01-27 수정일 2015-01-27 발행일 2015-02-01 제 2930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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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불행, 물질적 가치의 공식부터 깨라
지난해 8월에 있었던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은 커다란 감동과 함께 한국교회에 결코 가볍지 않은 십자가를 지워주었다. 교황은 한국 방문 첫날 주교들과의 만남에서 ‘교회의 교회다움’에 대해 물었다. 그리고 그 길을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에서 찾았다. 교황이 유독 ‘가난’을 강조하는 이유는 교회 창립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가난을 사심으로써 인류 구원 사명을 완수하셨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그분의 제자인 그리스도인들도 똑같은 길을 걷도록 부름 받고 있다. 가톨릭신문은 그리스도인,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스스로를 돌아보는 자기 성찰의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교황 방한 후속기획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마련한다. 이 기획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늘 새로움으로 깨어날 수 있는 쇄신의 방향을 함께 모색할 수 있는 장이 되길 기대한다.

#교회와 가난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

예수 그리스도가 ‘참행복’으로 선언한 ‘가난’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온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풀기 어려운 숙제로 다가온다.

‘물질만능주의’, 그리고 이를 떠받치는 개인주의가 최고의 가치가 되어 버린 현실에서 가난은 오히려 불행과 같은 말로 여겨지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비그리스도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예수의 ‘행복 선언’은 수수께끼처럼 읽히기 일쑤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현실의 원인을 복음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찾는다.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이강서 신부(서울 삼양동선교본당 주임)는 “행복은 과정과 관계 안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럼에도 물질적 가치 안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에 가난을 불행으로 인식하게 된다”면서 “행복을 물질적 토대와 완전히 바꾸어놓고 바라보게 되면 복음마저도 불편한 처지에 놓이게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작년 한국 주교들과 만남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는 복음의 중심에 있고, 그리스도인 생활의 필수 요소로 여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작년 8월 16일 꽃동네 희망의 집에서 장애인들과 인사나누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복음 속 가난

가난한 이들은 늘 복음의 중심에 있어왔다.

복음의 시작과 끝에도 가난한 이들이 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분명히 밝히신 대로 주님의 기쁜 소식이 향한 대상은 가난한 이들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루카 12,16-21),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카 16,19-31) 등을 통해 가난에서 멀어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헛된 일인지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지상 재화에 초연한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라고 가르친다.(루카 14,33 12,33-34)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은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루카 16,13)는 정언명령을 내놓는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루카 〃)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루카 16,14)은 재물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였지만 예수님은 재물과 은총이 무관하다고 보신다.

가난,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은 사도 시대를 거쳐 교회의 오랜 전통이 됐다. 주님의 제자들이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와중에도 어떠한 경우에도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문제로 여긴 것이 ‘가난한 이들에 대한 기억’(갈라 2,10)이었다.

복음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아니라 부자들을 위한 부유한 교회가 되려는 유혹을 꾸짖고 있다. 이 일은 사도 시대부터 있었던 일이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인들을 꾸짖어야만 했고(1코린 11,17), 야고보 사도는 더욱 강하고 분명하게 부유한 공동체들, 부자들을 위한 부유한 교회들이 짓는 죄를 꾸짖고 있다.(야고 2,1-7)

#교회가 선포하는 가난

교회는 가난이 복음에서 차지하는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끊임없이 강조해오고 있다. 가난한 이들이 겪는 고통, 그리고 가난이 고통이 되는 현실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몫임을 천명한다.

가난과 고통을 등치시킴으로써 가난한 이를 인간 이하의 불행한 상태로 전락시키고 마는 자본주의 사회의 변화를 촉구하고 나선 것도 교회였다. 이러한 흐름에 본격적인 첫걸음을 내디딘 교황 레오 13세는 「노동헌장(Rerum Novarum, 1891.5.15.)」에서 가난한 노동자도 모두 함께 교회의 자녀이며 인간으로서 똑같은 존엄성을 지닌 존재임을 역설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한걸음 더 나아가 회칙 「사회적 관심(Sollicitudo Rei Socialis, 1987.12.30.)」에서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용어를 공식화시키면서 ‘이 세상의 재화는 원래부터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천명했다(42항).

이렇듯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면서 가난을 추구하고자 하는 이유는 교회 창립자이시며 가난한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으신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기 위함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해 한국 주교들과 만남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연대는 복음의 중심에 있고, 그리스도인 생활의 필수 요소로 여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연대가 신자들의 정신과 마음에 스며들어야 하며, 교회 생활의 모든 측면에 반영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라는 사도 시대의 이상은 오랫동안 이상에 머물러왔던 면이 적지 않다. 이러한 현실의 이면에는 교황이 강조한 ‘번영에 대한 유혹’이 자리하고 있다. 이 유혹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가난에서 멀어짐으로써 예언자적인 누룩을 잃어버리고 한갓 ‘사교 모임’이 되고 마는 것이다.

‘가난’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정신을 지키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길임을 잠시라도 잊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상덕 기자>

■ 한국교회, 가난한 이들과 함께 걸어온 길

6.25전쟁을 치르고 가난이라는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경제성장’이라는 슬로건 아래 재화축적에 온 힘을 쏟아온 한국사회. 신자유주의의 물결에 휩쓸린 화려한 전망은 사회로부터 소외된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그림과는 좀체 어울리지 않는다.

한국교회, 가난한 이들과 함께

교회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가난한 이들이 있는 현장에서 함께해왔다. 도시빈민들의 격변기인 1970년대, 당시 서울은 대량이농으로 이미 포화상태였고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참사와 1971년 광주 대단지 사건 등 정부의 무분별한 정책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서울 인구 급증에 따라 무허가 건물과 판자촌의 수도 급격히 늘어났다. 지난 1987년 4월 14일 상계동 판자촌에서 강제철거 당한 주민들이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천막을 치고 생활하자, 당시 서울대교구장 고(故) 김수환 추기경(1922~2009)은 2주 만에 교구장 자문기구로 ‘도시빈민사목위원회’(현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이하 서울 빈민사목위)를 설립했다. 서울 빈민사목위 설립에는 고(故) 제정구(바오로·1944~1999) 의원과 고(故) 정일우 신부(1935~2014)의 역할이 컸다.

서울 빈민사목위 설립 이후 교회는 철거민 문제와 관련해 정부와 대척점에 서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빈민사목위는 교회적 차원에서 각 철거지역의 현장활동을 강화하고, ‘교회가 공식적으로 빈민들과 철거민들을 대변해야 한다’며 정부와 사회의 변화를 촉구하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섰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한국교회의 사회복지활동 역시 큰 변화가 있었다. 지난 1997년 11월 외환위기로 대량실업과 빈곤현상을 경험한 한국사회는 사회적 안전망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정부가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비롯해 다양한 유형의 사회보험과 사회복지체계를 확장함에 따라 교회의 사회복지활동도 점차 사회복지시설·기관의 운영 중심으로 자리매김했다.

사회복지시설·기관의 양적성장은 각 교구 사회복지회(국)의 전문화와 확대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의 전국적 협의·조정과 교회의 사회복지 전반에 걸친 방향정립 등이 강조됐다.

최근 정부지원을 받거나 정부시설에 수탁하는 교회의 사회복지활동이 두드러지는 가운데 교회가 시혜적인 나눔으로만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없지 않다.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는 이에 대해 지난 2012년 한시적으로 운영했던 ‘사회복지 종사자 교육 개발 소위원회’를 연장운영하고, 올해까지 ▲가톨릭 사회복지 기본교재 개발 ▲마음의 양성 프로그램 개발 등을 실시하기로 했다. 신자와 비신자간 업무조화를 도모하며 교회정신에 따른 사회복지 정체성 제고에 힘쓰기 위해서다.

1997년 4월 ‘집없는 이들을 위한 청빈선언 대행진’에 동참한 고 김수환 추기경.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2005년 4월 ‘벽산로 노점상 강제철거’ 관련 기자회견을 갖고 있는 수원교구 안양지구 사제단.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2005년 11월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에서 무료급식차량 ‘빨간 밥차’ 시범운영을 갖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2014년 12월 서울빈민사목위원회가 집 없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성탄 현장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교회가 걸어가야 할 가난의 길

정결·순명과 더불어 복음삼덕의 하나인 ‘가난’은 그리스도의 길이며 교회의 길이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실천적 사랑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로 제시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544항 참조).

교회는 오로지 가난한 이들만 찬양한다거나 풍요에 대한 화려한 전망만을 제시하지 않는다. 단순히 물리적 가난에서 해방되는 데만 관심이 있다거나 사회정의에 기반한 빈곤문제에만 몰두하지도 않는다.

가난한 이에 대한 우선적 선택, 가난으로부터의 해방과 사회정의에 기반한 빈곤문제 등은 모두 ‘죄’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라는 교회의 정체성과 ‘하느님 나라’에 대한 교회의 희망에 연결돼있다. 오늘날 경제성장의 화려한 전망과 어울리지 않더라도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이유다. <김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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