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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깨어있는가 / 이주연 편집팀장

이주연 편집팀장
입력일 2014-11-25 수정일 2014-11-25 발행일 2014-11-30 제 2921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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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한 인문학 강의 시간에서 였다. 어느 날 토론 과제가 주어졌는데, 주제가 ‘만약 내일 죽게 된다면, 하고 싶은 일 5가지’ 였다. 그때까지 가족이나 친척 지인의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 나로서는 영화나 책, 드라마 속에서의 일이었을 뿐, 죽음 그 자체가 낯설고 뜬금없는 소리였다.

내 차례가 돌아왔을 때 어떤 답을 했었는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렇게 ‘죽음’에 대해 뜬구름 잡던 생각과 경험의 범위만큼, 그저 단편적으로 또 다소 낭만적으로 죽음 준비 계획을 들려줬던 것 같다.

‘죽음’을 직접적으로 목격하게 된 것은 이후 그리 오래지 않아서였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불길한 어떤 것’이었던 것이, 너무도 빨리 곁에 다가왔다.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입사 1년차 기자였던 어느 날, 어머니는 잠든 상태에서 영영 깨어나지 못하고 내 곁을 떠났다. 특별한 지병도 없으셨던 터라, 준비고 뭐고 마음 추스릴 겨를도 없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멘붕’ 상태였다.

그 얼마 전, 세례를 받고 성당에 다니시던 모습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당시 가족 중에서 필자와 여동생만이 영세한 상태였다. 부모님은 딸들의 신앙을 반대하진 않으셨으나, 당신들은 그저 ‘나중에’라는 말로 입교를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 필자가 가톨릭신문에 입사하게 되자, 어머니는 그길로 아버지와 함께 예비신자 교리반에 이름을 올리셨다. ‘교회 기관에 근무하는 딸이 비신자 부모 때문에 행여 인사고과에서 나쁜 점수를 받을까봐’ 걱정하셨던 것 같다.

매일 기도서를 펼쳐 위령기도를 바쳤다. 눈물을 흘리다가도 ‘이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리라 믿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만날 때 까지’ 등의 구절에서는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모든 성인들의 통공을 믿으며’라고 기도할 때도 기도문 안에 담긴 산 이와 죽은 이가 서로를 위해 바치는 정성과 기도의 힘이 느껴졌다. 개인적으로 ‘신앙인들에게 진정한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해, ‘그리스도인의 희망’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는 계기였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였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1926~2004) 박사는 임종을 앞둔 이가 사망할 때 까지의 심경을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 다섯 단계로 설명한 바 있다. 죽음학으로 유명한 일본 상지대학의 데켄 신부는 이에 덧붙여 한 단계를 추가했다. 그는 저서 「행복한 죽음」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죽음을 맞을 때 나타나는 독특한 과정을 설명했는데, 바로 ‘기대와 희망’이라는 심리다.

이는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기대와 사랑하는 사람, 가족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소망을 말한다.

위령성월 마지막 날이면서 전례력으로 새해 첫 날인 오늘의 감상이 남다른 것은 그런 배경이 염두에 두어져서 일 것이다. 죽음을 묵상하면서도 다가올 새 날 새 희망에 대한 설렘과 기다림이 차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그러한 새 날과 새 희망에 대한 맞갖은 준비는 제대로 갖추고 있는것인지, 가슴에 손을 얹고 자문해 본다. 언젠가 대림시기 주일미사 강론에서 “ ‘구세주 빨리 오사’ 노래만 열심히 부르지 말고, 정말 그때가 왔을 때 하느님 앞에 모두 떳떳이 설 수 있을지 생각해 보라.”는 신부님 돌직구에 ‘뜨끔’했던 기억을 다시 떠올린다.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대림시기는 신앙인들에게 ‘깨어있는가’라는 화두를 던져준다.

이주연 편집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