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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이상과 현실의 긴장선상에서 / 박영호 취재1팀장

박영호 취재1팀장
입력일 2014-11-11 수정일 2014-11-11 발행일 2014-11-16 제 2919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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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헷갈리는게 많았다. 확실하다고 느낀 것도 없었고,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라고 느껴지는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 중 하나가 이상과 현실의 문제였다. 그리 거창한 이야기는 아니다. 쉽게 말해서, 원칙은 이건데 왜 항상 우리는 융통성을 발휘해야 하는 것인지가 궁금했다. 왜 이론상으로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배웠는데, 실제 생활에서 원칙에 따르다 보면 “참 답답한 인사”라는 취급을 받는지… 알 수 없었다.

“남의 물건을 훔치지 말라” 혹은 “살인하지 말라”라든가 하는 특급 계명들이야 원칙대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알고, 어길 생각도 없다. 하지만, 꼭두새벽 운전을 하다가 아무도 없는 변두리 횡단보도 앞에서, 빨간불이 켜졌다고 해서 넋놓고 파란불을 기다리다 보면 “이것 참 멍청한 짓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청소년기에야 이 문제가 별반 심각하진 않았다. 잘해야 성적 올리려고 커닝 한 번 하는 것 정도가 심각한 이상과 현실의 갈등이었으니까. 하지만 머리가 커지면서 내 삶의 하루하루, 시간시간들이 끊임없는 이상과 현실 사이 선택의 각축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대입을 앞두고서 나의 이상은 내가 태어나기 이틀 전에 요절한 전혜린, 그가 치열하게 머물렀던 뮌헨의 대학에서 철학과 시로 뒤범벅이 된 지적 허영심의 충족이었지만, 현실은 경영학이나 경제학을 전공해 좋은 직장을 얻어 편안하고 안락하고, 약간은 사치스럽게 사는 것이었다. 시절이 하 수상하여, 인문학이 사회과학에 치이던 시절이었고, 신앙에 입문, 종교와의 신혼기에 빠졌던 대학 1년생은 우여곡절 끝에 또 다른 이상, 신앙에의 봉헌을, 꿈꾸듯 선택했었다. 그리고는 또 다른 현실적 선택이 이어졌고, 다시 세속으로 나왔다.

신앙의 이상은 지금도 이어진다. 신에 대한 경외심에 바탕을 둔 인생이 이상인데, 현실은 그저 주일미사나 빠지지 않고 잘 가면 대견하다. 도덕과 윤리에 철저하고, 교황님 말씀대로 성인이 되기 위해서 뒷담화를 하지 않아야 하겠지만, 그게 어디 쉬운가. 혓바닥이 부르트고 입 가장자리에 침이 마를 정도로 험담을 하면서 내 정신건강을 보존한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이상과 현실의 긴장 관계를 결정적이고도 획일적인 하나의 잣대로 구분하려 하는 것은 어쩌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인 오늘날 구시대의 가장 폐습 중의 하나인 흑백논리에 빠져 있는 탓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한다. 누구나 모든 것이 나름의 타당성을 가진 것을 인정하는 오늘날, 내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지극히 도식적인 사고는 어쩌면 시대착오일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헷갈릴 수밖에.

그래서 생각해 본다. 이상과 현실은 반드시 긴장 관계여야 한다는 것이다. 팽팽한 긴장선상에서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이상의 원형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에 대한 너그러운 마음을 잃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긴장선상의 어느 한 지점을 선택할 때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라는 점이다.

교황을 포함한 시노드의 교부들이 지난 주교 시노드에서 보여준 것은 바로 그것이다. 원칙과 법들, 그 반대편에 선 현실의 고통과 괴로움, 그 둘 사이에서 교황은 원리와 원칙, 가르침을 훼손하지 않지만, 하느님 백성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자비가 가리키는, 긴장선상의 어느 한 지점을 내년 주교시노드 정기총회까지 고민하라고 숙제를 던져준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고보니, 며칠 전에 교황님은 지나치게 법을 강조한 것처럼 보이는 한 고위 성직자 추기경에 대한 단호한 인사조치를 하기도 했다.

그 뜻을 미루어 짐작하는데, 아는데, 그래도 헷갈린다.

박영호 취재1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