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일본 아키타에 한국인 순교자현양비 세워지던 날

일본 아키타에서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4-11-11 수정일 2014-11-11 발행일 2014-11-16 제 2919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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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땅에서 신앙 지켜낸 조선인 부부… 한·일 함께 순교 기려
한·일 신자들의 노력으로 11월 3일 일본 아키타 순교지에 조선인 순교자 식스토 가자에몬과 가타리나 부부를 기리는 ‘아키타 한국인 순교자 현양비’가 세워졌다. 우희수 신부가 ‘아키타 한국인 순교자 현양비’를 축복하며 성수를 뿌리고 있다.

11월 3일 일본 아키타 야바세혼초 젠료지(全良寺)의 한 묘역. 이미 초겨울의 매서움을 지닌 아키타의 바람에 비까지 쏟아지는 궂은 날씨 속에 조촐한 제막식이 열렸다.

“찰랑, 찰랑, 찰랑”

우희수 신부(대전교구 산성리본당 주임)가 현양비 앞에서 분향했다. 한국과 일본에서 모인 60여 명의 표정이 진지하다. 일본측 참석자 중에는 비신자도 많았지만, 순교자현양비 제막식에 이어지는 천주교 축복예절에도 엄숙함으로 함께했다.

한국과 일본에서 뜻있는 이들 모여

예절을 마치고 ‘아키타 한국인 순교자 현양비’가 정식으로 일본 땅에 세워졌다. 임진왜란 포로로 끌려가 1624년 일본 아키타에서 순교한 조선인 순교자 식스토 가자에몬(加佐衛門)과 가타리나 부부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 한국과 일본의 신자들이 마음을 모아 마련한 것이다.

높이 2.6미터, 무게 2.2톤에 달하는 이 순교자현양비를 세우기 위해 한국과 일본에서 신자·비신자를 막론하고 뜻있는 이들이 모였다.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 한국에서는 아키타한국인순교자현양비건립위원회(위원장 황기진)가 일본에서는 아키타순교비건립위원회(위원장 고마츠 다케루)와 아키타크리스찬역사연구회(회장 구마가이 야스타카)가 구성됐다. 이 자리에 함께하지 못한 이들을 합치면 100명이 넘는다.

제막식의 마지막에는 순교자들을 현양하는 마음을 담은 연희그레고리안성가대의 성가가 울려 퍼졌다. 한국과 일본의 몇몇 신자들도 익숙한 듯 성가를 흥얼거렸다. 서로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보편교회의 전례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함께한 순교자현양비 사업이 시작된 것도 바로 그레고리안성가 덕분이었다. 2005년 아키타에서 열린 제2차세계대전 종전 60주년 기념 세계평화기원국제음악회에 초대받아 그레고리안성가를 공연한 연희동본당 바오로성가대가 아키타에서 죽은 두 한국인 순교자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당시 아키타현 핸드벨연맹에서 함께 참가한 구마가이 야스타카(요셉)씨와 연희동본당 성가대는 이 두 순교자를 현양할 뜻을 모았다.

이후 아키타의 교회사를 연구하던 구마가이씨는 연희동본당의 정돈(안토니오·79)씨와 연락하며 수 차례에 걸쳐 이 두 순교자에 관한 사료(史料)를 공유했다. 이렇게 시작된 움직임은 2008년 당시 연희동본당 주임이었던 여형구 신부와 신자 99명이 순교지를 답사하면서 가속화돼 2014년 6월 위원회를 설립하고 국산 오석(烏石)으로 천주교식 비석을 제작, 일본에 보냈다.

일본에서 이뤄진 현양비 사업은 단순히 천주교만의 행사가 아니라 종교를 넘어선 화합을 이끌어냈다.

식스토 가자에몬과 가타리나 부부가 순교한 구소즈(草生津)강변은 3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지형이 많이 변했을 뿐 아니라 이미 도시화가 진행돼 현양비를 세울 자리를 확보하기도 만만치 않았다. 여기에 도움을 준 것은 다름 아닌 인근의 사찰인 젠료지다.

일본 순교비건립위원회는 젠료지 소유의 땅 일부를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샀다. 젠료지 측은 비록 종교는 다르지만 “부처님 자비의 마음으로” 땅을 필요로 하는 천주교 신자들에게 절의 땅을 팔았다. 일본 순교비건립위원회 위원장 고마츠 다케루씨는 “위원회에도 신자보다 비신자가 더 많다”면서 “위원회 모두가 종교를 넘어 평화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현양비 건립사업에 함께 했다”고 말했다.

순교자 현양은 계속 이어져

현양비를 세우는 사업은 끝났지만, 순교자 현양은 앞으로도 이어진다. 아키타크리스찬역사연구회는 현양비를 관리하면서 순교자들이 시복시성에 이를 수 있도록 사료 발굴과 연구를 지속적으로 진행할 계획이다. 아키타크리스찬역사연구회장 구마가이씨는 “현양비 조성으로 아키타 사람들도 이곳에 순교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역사적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라면서 “한국의 신자들도 이곳을 많이 찾아 순교자들을 현양해주길 바란다”고 전했다.

한국 측 위원회도 아키타성모성지 등을 찾는 한국 신자들에게 두 순교자와 그 현양비를 소개하고 순례하며 그들의 순교를 기억할 수 있도록 여행사 및 현지 가이드 등과 협력해 나갈 계획이다.

제막식에서 성가를 부르고 있는 연희그레고리안성가대.
황기진 위원장(왼쪽)이 구마가이 회장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고 있다.
현양비가 위치한 젠료지의 묘역에 있는 오래된 십자가 형 묘비들.

■ 식스토와 가타리나 부부는

임진왜란 때 끌려온 금광기술자로 추정

8개월 넘게 옥중생활 신앙지키며 함께 순교

식스토 카자에몬(加佐衛門)과 가타리나 부부는 아키타에서 신앙을 증거하다 목숨을 잃은 조선인 순교자다.

이들 순교자들의 이야기는 당시 일본에 파견된 예수회 사제들이 남긴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아키타 남부 데라자와의 은광산 인근의 마을에서 생활했다. 그곳은 각지의 무사와 광산 노동자들이 이주해 살던 곳으로 일본 남부지방에서 시작된 박해를 피해 숨어있던 신자들이 생활하던 곳이다.

이들 부부는 1590년대 임진왜란 중 포로로 일본으로 끌려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부부는 금광기술자로서 금광기술을 일본인에게 전해주며 살아갔을 가능성이 높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포로로 삼은 조선의 많은 기술자 중 하나였을 것으로 보인다.

아키타에 박해가 일어난 것은 1613년부터다. 특히 두 순교자가 죽은 1624년에는 박해가 심해 이 해에 순교한 이만 100여 명에 이른다.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잡혀 다른 14명의 신자들과 감옥에 갇힌 식스토와 가타리나는 8개월이 넘는 기간 비좁은 감옥에 가혹한 대우를 받으며 옥중생활을 했다. 박해자들이 가한 고통으로 인해 2명은 옥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들은 어느 신부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저희가 이 감옥의 육체적 고통 속에서 백년을 있을지라도 저희의 믿음은 결코 약해지지 않을 것”이라고 전할 정도로 굳은 의지로 신앙을 지켜나갔다.

마침내 이들 부부와 여러 신자들이 9월 4일 영주의 집으로 끌려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포기하라고 강요받았지만 모두 “그 같은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마디로 거절했고 이들은 바로 그날 참수형에 처해졌다.

이들의 죽음에 인근에 숨어 있던 신자들이 슬퍼하며 정성을 다해 장례를 치렀다고 전해지지만 이들이 묻힌 정확한 위치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처형장이었던 구소즈 강 옆에 위치한 사찰인 젠료지가 박해시기와 그 이후에도 절의 묘역에 천주교 신자들을 묻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서 연구자들은 절 인근에 묻혀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젠료지의 묘역에는 아직도 아무도 찾지 않는 오래된 십자가 형 묘비들이 다수 있다.

■ 황기진 순교자현양비건립위원장

“한·일 신자 노력의 결실… 아키타뿐 아니라 일본서 순교한 선조들 현양하고 싶어”

“우리 선조지만 400년 동안 잊혀진 분들을 이제야 현양할 수 있게 됐습니다.”

아키타한국인순교자현양비건립위원회 위원장 황기진(바오로·80)씨는 아키타한국인 순교자현양비 제막식을 마치자 만면에 기쁨의 미소를 띠웠다. 6년 전 일본 아키타에서 신앙을 증거하며 목숨을 잃은 두 선조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팠던 그 마음이 이제야 풀렸다.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한일 신자들의 친교가 우리 선조인 순교자들을 현양할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었습니다.”

이번 순교자현양비 건립은 한일 신자들이 함께 노력한 결과였다. 과정은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위원회가 구성되고 가장 먼저 한 작업은 아키타 지역의 관할교구인 니가타교구의 협조를 얻는 일이었다. 일본에서 죽은 이 두 순교자의 현양사업을 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순교지역인 일본에서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막막하기만 한 이때 현양비 건립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과 일본의 많은 신자들의 도움 덕분이었다.

특히 이번 현양사업은 한·일 양국의 평신도를 중심으로 진행돼 그 의미가 크다. 황 위원장은 “이번 현양비 건립으로 평신도의 역할이 중요함을 느꼈다”고 말하고, “이 일이 좀 더 공적으로 이뤄졌다면 더 많은 평신도들이 함께 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전했다.

현양비는 건립했지만, 황 위원장은 일본의 한인순교자 현양사업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할 수 있는 한 아키타뿐 아니라 일본의 이곳저곳에서 목숨을 잃은 한인 순교자들을 현양하고 싶은 마음이다.

“아키타의 순교자를 더 알리면서 이분들처럼 일본 땅에서 목숨을 잃은 다른 순교자들을 찾아 현양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조그마한 노력으로 순교자들을 기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이 일에 같이하는 분들이 앞으로 더 많이 생기리라 믿습니다.”

일본 아키타에서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