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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공부 안 하면 주님에게서도 멀어진다 / 서상덕 취재2팀장

서상덕 취재2팀장
입력일 2014-11-04 수정일 2014-11-04 발행일 2014-11-09 제 2918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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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신자들은 다른 종교 신자들에 비해 공부를 잘 안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얘기가 나온 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건 신자들 사이에선 비밀 아닌 비밀이 된지 오래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사이비 종교인들은 물론 이웃종교 신자들까지 가톨릭을 얕잡아(?) 보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지기도 한다.

학창시절을 떠올려보면, 공부에 엔간히 소질이 없는 친구들도 학년이 올라가면 갈수록 스스로 답답함을 느껴 공부 잘하는 친구 주위를 맴돌기 마련이다. 뭔가 배울 만한 게 있을까 싶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손쉽게 공부 잘하는 비법이라도 있나 캐보려는 심리도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게 있을 리 만무하다.

2000년이라는 시공을 뛰어넘어 예수님의 행적을 떠올릴 수 있게 해주는 신약성경을 읽다보면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과 뭇사람들을 가르치시는 내용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필자는 어렸을 때 ‘하느님께서 인간을 보고 계시자니 얼마나 답답하셨으면 당신 외아들까지 보내셨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그러니 예수님의 주 임무가 당신 자녀들을 가르쳐서, 문리가 트일 정도는 아니더라도 하느님 나라를 깨우치게 하는데 있었음을 짐작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조금만 관심을 갖고 성경을 들춰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직접 가르치시거나 몸소 모범을 보이시며 가르침을 주시는 사례를 쉽게 찾을 수 있다. 하느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 가르치시거나 죄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도록 타이르시는 모습, 기도하는 방법과 형제를 용서하는 법을 일러주시는 장면, 비유를 들어 눈먼 백성을 깨우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는 자상한 아버지이자 교사의 모습이 드러난다.

오늘날의 우리로 보면 초등학생쯤 되는 어린 시절부터 회당에서 율법교사들과 어울리셨을 뿐 아니라 바리사이들을 호통 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분명 그분의 삶도 공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공부’라는 말은 원래 불교에서 말하는 주공부(做工夫)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공부’(做工夫)란 ‘불도(佛道)를 열심히 닦는다’는 뜻인데, 그 중에서도 특히 공부는 참선에 진력하는 것을 말한다. 공부라는 단어를 자세히 뜯어보면 만들 工(공)자와 사내, 일꾼 등을 뜻하는 夫(부)자로 이뤄져 있다. 글자 그대로만 보면 공부란 ‘사내다운 사내를 만드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사내’를, 가정을 꾸리고 식솔들을 건사할 수 있는 능력과 책임을 지닌 존재로 보았다. 그러니 곧 공부란 한 가정을 책임질 수 있는 어엿한 성인을 길러내는 일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공부하라’는 말은 ‘사람이 되라’는 말이나 진배없는 셈이다.

그런데 가톨릭 신자들 가운데 많은 수가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세례 받고 나면 끝’인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다 보니 나이 먹어 예의 ‘열등생’ 마냥 멋쩍게 머리 긁적이게 되는 상황과 자주 맞닥뜨릴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경우는 교수나 교사 등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이들을 비롯해 이른바 ‘먹물’깨가 든 지식인들의 경우 더욱 심각하게 나타나는 것 같다. 자신들이 지닌 한정된 지식으로 마치 세상 모든 진리를 꿰뚫을 수 있는 양 여기는 모습에서는 예수님께서 그토록 싫어하셨던 바리사이들의 모습마저 비친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바리사이들이 어떻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졌는지 잘 알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믿는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하느님은 애초부터 다른 분이다.

하느님 나라 공부에 있어 열등생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느님만이 아실 일이다. 다만 미루어 짐작컨대 하느님을 알아가는 기쁨은 크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서상덕 취재2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