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전통 영성의 샘을 찾아서] 유럽 동방정교회 수도원 순례기 (1) 그리스·불가리아 지역

노춘석(멜라니아·창녕공고 교사),사진 김상희(데레사·대구 성안드레아본당)
입력일 2014-09-16 수정일 2014-09-16 발행일 2014-09-21 제 2911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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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맞닿은 수도원서 천국을 바라보다
평균높이 300m 기암괴석 위 영적 풍요 이룬 ‘메테오라’ 순례자에게 정화 기회 제공
불가리아 신앙 뿌리 ‘릴라’ 이슬람 맞선 독립운동 구심점 수사들 양성해 민족정신 전파
613m 바위기둥 절벽에 세워진 대 메테오라 수도원. 146개 돌계단 끝에 새겨진 ‘천국의 것을 바라라’는 글귀는 순례자에게 정화의 시간을 준다.
그리스 메테오라 발람수도원을 찾은 순례자들.
지난 2006년부터 유럽 수도원 순례를 통해 가톨릭교회 영성의 근원 자리를 찾았던 가톨릭신문이 7월 23일~8월 4일 10차 순례를 실시했다.

특별히 그리스, 불가리아 등 발칸지역 동방정교회 수도원 방문 여정으로 마련된 순례를 노춘석(멜라니아·창녕공고 교사)씨 후기로 3회에 걸쳐 소개한다.

■ 신화의 땅에 핀 그리스 메테오라 동방정교회

발칸지역 동방정교회 수도원을 돌아보는 제10차 수도원 순례는 그리스, 불가리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크로아티아 등 옛 유고연방지역을 순례하며 종교로 인한 아픈 역사를 밟았다. 순례기간 내내, 동서방 교회 분리 후 서로 낯선 이방인으로 외면한 시간을 돌아봐야 했다. 폴란드 출신인 요한 바오로 2세의 사랑과 평화의 간절한 호소를 들으며 종교의 의미와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증오, 갈등, 그리고 분쟁의 얼룩진 역사를 보며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할 수만은 없는 송구함에 마음이 무거웠다.

인류 문화가 화려하게 꽃피고 수많은 신화가 떠도는 땅, 동방정교회의 신비한 수도원 이야기가 있는 땅, 철학과 호메로스, 사포와 올림픽, 빛나는 햇살과 신전이 있는 그리스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향한 여정에 모든 것을 맡겼다.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는 마음으로 우리는 순례의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평균 300m 높이의 기암괴석 파노라마가 70여 리 이어지는 메테오라는 유네스코 문화자연유산으로 공중에 떠있는 수도원을 의미한다. 11세기부터 은수자들은 세상과 외떨어진 핀두스 산맥 속 피니오수 강이 흐르는 하늘 기둥에 올라 바위벼랑에서 살았다. 그들은 세상을 향해 내려가는 삶이 아닌, 하늘의 삶을 올려다보면서 도르래로 끌어올린 최소한의 물자로 거친 바람과 추위, 굶주림과 갈증 속에서 금욕적이고 가난한 바위 위 영적 풍요를 이루었다. 절벽 위 수도원은 아찔하도록 험한 곳에 있었다. 무엇이, 왜, 이곳으로 그들을 끌어올렸을까?

14세기 초, 성 아타나시우스가 대 메테오라 수도원을 연 후, 13개의 대수도원과 20여 개 은수처를 세워 15세기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여자들의 출입을 허용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지금도 여자들은 수도원 입구에 준비된 치마를 둘러야 들어갈 수 있다. 하늘에 닿은 대 메테오라 수도원과 발람, 루사노, 스테파노, 가장 아름답지만 가장 힘들게 오른다는 성삼위(트리니티) 수도원을 이틀 동안 순례했다.

첫날은 푸른 하늘 흰 구름과 따가운 햇볕을 받으며 빛나는 메테오라를 보았고, 둘째 날은 귀한 부슬비를 맞으며 검은 구름이 깔린 어둡고 음산한 모습을 만났다. 대부분 수도원은 오랫동안 도르래를 타고 올라가야 했고 계단과 다리를 놓아 일반인이 출입한 것도 최근부터였다.

메테오라 수도원 성당의 천장 돔에는 삼위일체 하느님이, 아래는 복음사가와 사도들, 성인들이 프레스코화로 장식돼 있다. 수도회가 따로 없는 정교회수도원 구조는 비잔틴양식을 따라 대부분 비슷하게 이뤄졌다. 성화는 수도승들을 관상세계로 이끌며 하늘나라를 바위 봉우리에 펼쳐냈고 그들의 깊은 신심은 순례자에게 전해져 전율을 주었다.

산기슭에 바위기둥 하나를 잡고 서 있는 알바니아 정교회 루사노 수녀원의 작은 꽃밭에는 수도승을 닮은 고운 꽃이 피었고, 프레스코화로 만나는 하늘나라와 수도원 창문으로 내다본 산 아래 마을과 계곡은 초록에 묻혀 평화와 환희를 주고 있었다. 접근이 쉬운 성 스테파노 수녀원은 보존상태가 제일 좋아 많은 순례자로 붐볐다.

대 메테오라 수도원의 146개 돌계단 끝에 새겨진 ‘천국의 것을 바라라’는 글귀는 613m 바위기둥 절벽성당에 오른 순례자에게 지난날을 돌아보는 정화의 시간을 주었다. 성당 첫 방은 정화와 교리실, 중간방은 신자들이 두 시간 이상 서서 미사를 드리는 성당이며 안쪽은 사제가 들어가는 지성소로 세 방은 성경 말씀 프레스코화로 채워져 있다. 다만 성체를 모신 감실은 정교회 성당에는 없었다.

한국 드라마를 좋아한다는 유쾌한 정교회 사제 세 분을 만나며 문득 벼랑 위 옛 은수자들이 그리워 높은 절벽 위 성삼위 수도원을 찾아갔다. 한국 순례객은 처음 맞이한다는 이곳은 밧줄 사다리나 광주리에 사람을 담아 끌어올렸다. 1925년 돌을 쪼아 140개 계단을 만들었고 제임스 본드의 007영화 추격 장면에 나와 유명세를 탔다.

1476년 도메티우스 수도승이 세운 수도원 입구에 빗물로만 생활하던 옛 생활을 보여주는 큰 물항아리가 있었다. 자비의 성모 이콘은 신앙을 멀리한 이들의 오감에 호소하는 슬픈 눈빛으로 떠나는 마음을 사로잡았다. 정교회수도원의 성모님은 유독 비탄에 젖어 보는 이를 아프게 했다. 신비의 수도원은 세상의 호기심이 되고, 천년의 비바람에도 꿋꿋하게 하느님을 찬양하는 수도승들이 바친 기도는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었다.

비가 그치고 맑은 기운이 퍼지는 바위산에서 메테오라는 신화의 땅에서 세상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새로운 신화를 순례단에게 보여주었다.

■ 동방교회의 어머니, 불가리아 릴라수도원

불가리아정교회는 한때 동방교회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며 민족주의적 이단으로 몰려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로부터 파문당했던, 불가리아적 색채가 강한 정교회이다. 릴라수도원은 불가리아의 정신을 대표하는 곳으로 동방교회의 어머니이며 이슬람 저항 본거지로 불가리아 신앙의 뿌리이다. 릴라산맥 최고봉이 올려다 보이는 1150m 수려한 산중에 자리잡고 있다.

10세기 릴라의 성 요한으로 불리는 이반 릴스키 수도승이 은수 수행을 하며 야생동물과 사람들에게 치유의 기적을 행하자 깊은 계곡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수도원은 제자들을 받아들이면서 자리를 잡아 14세기를 지나면서는 요새처럼 튼튼하게 건축되어, 오스만 터키 점령 때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500여 명에 달하는 수사들을 양성, 신앙과 민족 정신을 전파시켰다. 가혹한 탄압에 저항하며 하느님께 의지한 불가리아 정신은 릴라에서 비롯된 것이다.

돔 지붕 24개의 성모대성당을 가운데 두고 성벽 양 날개처럼 빙 둘러 선 회랑 4층 건물은 석조와 목조로 건축하여 섬세한 난간 조각품과 얼룩말 무늬 아치형 기둥이 줄지어 미의 극치를 이루었다.

19세기 프레스코화 1200여 점을 품고 있는 화려한 성당에서 불가리아인들은 옛 방식으로 기도하고, 사제는 성수를 듬뿍 뿌리며 성물을 축복하는 이색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특히 최고의 공경을 받는 이반 릴스키 성인의 유리관에 입 맞추는 사람들 모습은 순례자를 경건하게 했다.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릴라에는 4명의 노수사가 객실을 운영하며 방문객을 맞기에 바빴다.

순례단은 불가리아의 맥을 이어 불굴의 정신으로 영혼의 장수국이 되게 한 릴라의 아름다운 산중에서 거룩한 기도로 나라를 구한 열렬한 애국자들을 생각했다. 산, 릴라의 신념, 프레스코화의 강한 기운을 받은 우리는 청청한 개울물 소리를 반주 삼아 미사를 봉헌했다. 회오리 바람에 실린 세찬 소나기가 숲을 흔들 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비로 우리들 마음 속의 가라지를 뽑아내셨다.

■ 보야나의 삼나무 숲

“나는 이 역사 안에 어떤 가치로 사는가?” 소피아 정교회성당을 순례하며 신부님이 주신 과제를 안고 가격이 가치로 혼돈되는 시대에 영원한 가치를 품은 보야나 성당을 방문했다.

소피아 외곽 삼나무 숲 속 작은 석조성당 보야나는 왕가의 별장지대에 위치하여 왕족들의 사적 기도처로 1048년 건축되었다. 시대가 다른 세 동의 건물을 하나로 잇는 둥근 지붕 그리스 십자형 평면이 특징인 중세 성당은 프레스코화로 장식하고 89개 장면에 개성을 살린 240명이 넘는 인물의 그림이 유명하다. 중앙 벽화는 심하게 손상되어 유네스코 지원으로 복원 중이었다.

작은 성당 벽화에는 12살 예수가 성전에서 어른의 눈매로 토론하고 아들을 찾은 요셉과 마리아가 조심스레 서 있는 환희의 신비 5단 장면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성모자화의 애절한 눈빛은 순례자를 참된 가치와 감동으로 이끌었다. 거대한 삼나무 정원에서 고풍스런 보야나의 정취에 끌려 하느님의 든든한 가치가 되고 싶은 순례단은 불가리아 영혼의 씨앗을 가슴 깊이 묻었다.

불가리아의 정신을 대표하는, 동방교회 어머니이며 불가리아 신앙의 뿌리 릴라수도원.

노춘석(멜라니아·창녕공고 교사),사진 김상희(데레사·대구 성안드레아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