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124위 시복건 로마 주재 청원인 김종수 신부

서상덕 기자
입력일 2014-08-20 수정일 2014-08-20 발행일 2014-08-24 제 2909호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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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향한 신자들 열성과 기도로 결실”
16일 시복식, 124위 약전(略傳, 소개문)을 낭독하던 김종수 신부(로마 한인신학원장)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에게는 시복이 남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지난 1997년 주교회의 가을 정기총회에서 조선왕조 치하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작업을 통합 추진키로 결정하면서, 전국 각 교구에서 산발적으로 시복작업을 추진하던 담당 사제들을 불러 모으고 청구인으로 시복 통합추진을 궤도에 올려놓은 게 그였기 때문이다. 로마 한인신학원장으로 있으면서 ‘124위 시복건 로마 주재 청원인’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김 신부는 지난해 3월 12일 순교자 124위의 포지시오(Positio, 교황청 시성성 통상 회의에서 안건의 최종 결정을 위해 보고관이 작성하는 최종 심사 자료)가 시성성 역사위원회를 통과하던 때를 잊을 수 없다. “시성성 장관 안젤로 아마토 추기경께서도 포지시오를 잘 만들었다고, 모범이 된다는 평을 하셨습니다. 결코 어느 한 사람이 이뤄낸 결과가 아닙니다. 순교자를 따르려는 한국교회 신자들의 열성과 기도가 일궈낸 결실입니다.”

실제 103위 시복 당시에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라틴어나 불어로 쓴 보고서나 서한, 문서 등 사료가 풍부했던 데 비해 이번에는 사료도 풍부하지 못했다. 더구나 시복 추진을 해본 경험이 없어 새로 개정된 시복시성절차법에 따라 시성성에 절차와 관행을 일일이 확인하며 진행해야 했다. 이 때문에 김 신부와 공동연구자인 정시몬 신부의 남모를 고생이 적잖았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2008년 시복된 일본교회 순교자 ‘베드로 키베(岐部) 사제와 동료 187위’가 교황청 시성성에 시복청원서를 전달한 후 시복되기까지 10여 년이 걸린 데 비해 한국교회는 시복 청원을 한 지 4년9개월 만에 시복 결정의 기쁨을 누리게 된 것이다.

서상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