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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방한, 응답하라 2014 한국교회 (9·끝) 하나 되게 하소서

서상덕 기자
입력일 2014-08-12 수정일 2014-08-12 발행일 2014-08-17 제 2908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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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주기’란 말에 밀려선 안돼… 한반도 평화는 교회 필수과업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요한 17, 21)

예수 그리스도가 유다의 권력자들에게 잡히기 전 성부께 바친 기도는 믿는 이들이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성부께서 당신을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기 위함이었다. 아울러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믿는 이들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바로 자신이 그리스도의 분신임을 드러내고 하느님의 사람임을 드러내는 일이다.

민족화해와 일치를 향한 우리 겨레의 여정에서 한국교회는 누구도 넘보기 힘든 큰 봉우리였다.

1995년 북한을 휩쓴 대홍수와 그에 이은 대기근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민족화해의 역사에서 새로운 장도에 나서도록 이끌었다. 색깔론과 온갖 이데올로기가 난무하는 속에 고(故) 김수환 추기경으로 인해 트인 화해의 물꼬는 한국교회로 하여금 민족화해 역사에 선구자로 우뚝 서게 했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민족화해를 위한 교회의 통일사목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휘청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수면 깊숙이 가라앉아 언제 다시 떠오를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모습이다.

통일은 우리 민족에 선택이 아닌 필수이기에 통일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이를 바탕으로 한 준비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하지만 통일은 우리 민족의 오랜 소망이자 해묵은 숙제에 머물러 온 것 또한 사실이다. 통일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접근은 더 큰 앙금만을 남게 했고, 경제논리에 따른 접근은 통일에 대한 의식 약화를 불러왔다. 이는 그리스도 정신이 세속의 경제주의, 색깔론에 자리를 내주면서 빚어지고 있는 상황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이뤄지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은 교회 공동체를 뛰어넘어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여정에도 큰 기대를 안겨주고 있다. 민족 분단의 아픔이 더해가고 절망이 깊어지고 있는 가운데 이뤄지는 교황의 방한은 민족 화해와 일치를 위한 역사에서 새로운 교두보를 마련해줄 것인가.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계기로 한국교회가 개척해나가고 있는 민족화해의 여정을 되짚어본다.

한국교회 민족화해 노력

한국교회가 6·25전쟁 이후 처음으로 북한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65년 6월 주교회의가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를 바치기로 결정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는 냉전 이데올로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과 1984년 한국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은 목마름에 지쳐 스러져가던 민족화해 여정에 마중물이 되어주었다. 이 기념해를 계기로 사회적으로도 통일에 대한 열기가 고조되면서 교회는 민족화해 문제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1982년 2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북한선교부’가 신설되고 1985년에는 주교회의 북한선교위원회가 출범한다. 특히 1989년 문규현 신부의 방북은 교회는 물론 온 겨레가 통일문제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지평을 열어놓았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공식적 대북 접촉은 1987년 장익 신부(전 춘천교구장)가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협력에 관한 비동맹국가 각료회의’에 바티칸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한 것이 최초다. 이를 계기로 이듬해 북한에서는 조선천주교인협회(현 조선카톨릭교협회) 결성, 장충성당 건립 등이 이뤄졌고 박창득 신부 등 북미주 교포 신자들의 방북도 이뤄지게 됐다.

이어 해방 50돌이던 1995년 3월 서울대교구에 민족화해위원회가 결성되면서 민족화해·일치 운동은 새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특히 그 해에 북한에 큰물 피해와 가뭄으로 인한 기아가 만연하면서 민족화해 여정은 결정적인 분수령을 맞이한다. 당시 서울대교구 한마음한몸운동본부는 북한에 첫 지원금 8000만원을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전달하고 본격적인 대북 지원에 나섰다. 그 해 10월 미국 뉴욕에서 서울 민화위 대표단과 조선천주교인협회 관계자들이 만나 ‘조국 통일을 위한 천주교인의 연대 강화’를 주제로 세미나를 열면서 남북 교류에 새로운 활로를 마련하게 된다.

또 교회가 나서 1995년 10월 ‘범종단 북한수재민돕기 추진위원회’를 구성, 북한 수해 복구를 위한 대북 인도적 지원의 물꼬를 트는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1996년 4월에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평화통일 기원미사’가 남북한에서 동시에 봉헌되기도 했다. 이어 1997년부터 남북 종교교류를 주도해 민족공동행사 추진본부를 구성, 3.1민족대회를 이끌어내는 등 민족화해와 협력 증진에 기여했다.

1996년 사랑의 국수나누기운동으로 본격화하기 시작한 북녘 형제들을 향한 한국교회의 몸짓은 평양 국수공장 건립(1996년), 북한동포를 위한 국제 단식 모금운동(1997년), 북녘 형제 돕기 국수나누기운동(1998∼2000년), 겨울 옷 보내기운동(1998년 12월) 등으로 다양하게 전개되며 반세기 넘게 뇌사상태에 빠져있던 한반도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이러한 모색을 통해 북한에는 한국교회가 지원하는 옥수수 밀가루 등 수많은 식량과 분유 의약품 농기구 국수기계 차량 등이 전해져 민족화해 여정에 밑거름이 됐다.

2004년 북한 룡천역 열차 사고 때도 한국교회는 특별모금운동을 실시했으며, 2005년 대북농업 개발사업 ‘씨감자 무균종자 배양시설’ 건축을 도우며 통일 기반 마련에 힘을 쏟았다. 2006년에는 국제 카리타스 대북지원 사업대표 실무기구로 위임되고 다음해인 2007년에는 통일부 대북지원 사업단체로 지정돼 민족화해와 일치를 위한 우리 민족의 여정을 이끌어오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은 교회 공동체를 뛰어넘어 민족 화해와 일치를 위한 여정에도 큰 기대를 안겨주고 있다. 사진은 ‘2012 세계 평화의 바람’ 참가자들이 휴전선 철조망에 희망을 적은 리본을 달고 한반도의 평화를 기원하는 기도를 바치고 있는 모습.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남북 교류, ‘퍼주기’인가 ‘사랑 실천’인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향한 여정에서 ‘퍼주기’라는 용어만큼 공동체 구성원 간 인식 차를 드러낼 뿐 아니라 갈등을 빚어낸 말도 없을 듯하다. 해방 50돌을 맞이하던 1995년 북한의 큰물 피해와 가뭄으로 초래된 참담한 기아 사태는 북한 정권을 향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던 국제사회는 물론 오랫동안 총칼을 들이대고 으르렁거리던 남북 간에도 생명의 물이 흐르게 했다.

하지만 순수한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형제애의 발로로 이뤄진 식량 중심의 대북지원은 ‘퍼주기’라는 말에 걸려 넘어지기 일쑤였다. 더 이상 ‘색깔론’이 쉽게 먹혀들지 않는 현실에서 등장한 이 용어는 아직도 분단의 아픔과 앙금을 지니고 있는 이들의 혼란을 부추겼다.

어느 새 그리스도인들 안에도 깊숙이 잠복하게 된 이 단어는 수시로 수면 위로 떠올라 겨레의 화해를 위한 항로에 암초로 작용하고 있다. 교회가 선도적 역할을 하며 개척해온 민족화해의 길도 수시로 ‘퍼주기’라는 말에 묻히곤 했다. 그리스도인들의 지상과제인 일치가 또 다른 색깔론인 이 말에 넘어지길 반복하고 있는 모습이다.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 이기헌 주교는 “우리는 교회에 맡겨진 민족 화해의 사명을 기억하면서 먼저 우리 자신이 사명에 충실했는지 반성해야 한다”며 “기도와 희생은 소수의 일이었을 뿐, 대부분 분단과 북한 주민들의 고통에 무심하게 살아왔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정권이 바뀌면서 민족 화해와 한반도 평화를 위한 교회의 행보는 뒷걸음치고 있는 모습이다. 선구자적으로 민족 화해의 흐름을 이끌어가며 순간순간 새로운 물꼬를 트던 모습은 사라지고 오히려 정부의 정책에 따라 갈팡질팡하고 있다.

이은형 신부(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총무)는 “교회가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제대로 받아 안지 못함으로써 급변하는 정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해 민족화해를 위한 동력을 상실하게 됐다”면서 “한반도 평화를 바라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과 더불어 쇄신의 계기를 찾아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신부는 또 “교황 방한을 일회적 이벤트로 끝내지 않고 우리 민족의 역사뿐 아니라 주님의 구원 역사를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전기로 삼기 위해서는 평화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내면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면서 “하느님께서 우리 시대에 주시는 징표를 잘 찾아 주님의 뜻에 따라 방향을 전환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한반도 평화,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 소명

“평화는 거저 받는 선물이 아니라 우리가 떠맡아야 할 과업입니다. 진정한 평화의 일꾼이 되려면, 우리는 스스로를 교육하고 연민과 협동, 형제애, 능동적 공동체 활동을 배워야 합니다.”(교황 베네딕토 16세 ‘제45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세계 유일의 분단국인 한국은 지정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도 동북아시아, 나아가 세계 평화의 바로미터와도 같은 곳이다. 교황의 사목 방문이 대부분 평화를 필요로 하는 곳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도 그리스도의 평화에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 프란치스코 교황은 즉위 후 처음으로 맞은 예수 부활대축일인 지난해 3월 31일 아침 미사를 거행한 뒤 첫 부활 담화(Urbi et Orbi)를 발표하면서 특별히 한반도 평화를 기원했다. 그는 “한반도에서 불화가 극복되고 새로운 화해의 정신이 자라나기를 바란다”면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증오를 사랑으로, 복수를 용서로, 전쟁을 평화로 바꿔주시기를” 청했다.

한국교회는 이번 교황 방한의 의미 중 하나로 “한반도야말로 세계 평화를 가장 크게 위협하는 지점이자 동시에 새로운 평화의 시대를 열 수 있는 현장”이라며 “남북한의 화합과 일치는 한반도의 안정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동북아의 평화, 세계의 평화에 크게 기여하는 중요한 단초가 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교황의 방한을 두고 찬반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교회가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의 삶과 신앙을 신자들에게 제대로 전달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남북관계는 긴 안목이 필요하다. 특정 사안이 벌어질 때마다 일희일비할게 아니라 공존과 상생이라는 마음을 바탕에 두고 접근해야 한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상대에 대한 인정과 배려가 필요하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은 상황에서 말로만 민족화해를 외친다면 일치는 요원할 뿐이다.

통일연구원 임순희(헬레나) 선임연구위원은 “그동안 민족화해의 길이 막힐 때마다 숨통을 열어온 것은 교회를 비롯한 종교계였다. 종교를 포함한 민간의 교류가 어떤 상황에서도 끊어지지 않도록 정부에서도 적극 지원해야 한다. 민족화해를 향한 새로운 길을 꾸준히 모색할 때 민족화해와 일치를 향한 활로가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발걸음 안에서 광복 70주년을 맞는 오는 2015년은 한국교회에 새로운 기회다. 평화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확인하고 보다 적극적인 모색으로 민족의 활로를 열어나가야 할 것이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교회가 새롭게 나서야 할 때다.

서상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