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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순교영성에 물들다] (3·끝) 해미성지

이지연 기자,사진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4-08-05 수정일 2014-08-05 발행일 2014-08-10 제 2907호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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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의 ‘살아있는 하느님 체험’ 내 삶에서도…
힘든 삶·억울한 죽음에도 어떻게 행복할 수 있었을까?
박해 피할 방법 있었을텐데 순교 택한 이유는 무얼까?
하느님과 인격적 만남 가졌던 선조들 삶에서 답 찾아
스스로의 삶 안에 순교영성 실천하기 위한 노력 다짐
오는 8월 17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시아 청년대회 폐막미사 주례를 위해 방문하는 해미읍성을 찾은 강석진 신부(맨 오른쪽)와 청년 순례자들. 왼쪽부터 신주욱, 신재민, 신수원씨.

치열했던 과거가 켜켜이 쌓여 현재가 된다. 지금의 한국교회가 총 신자 수 540여만 명에, 성직자와 수도자 수 1만6000여 명을 기록하며, 찬란하게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은 신앙선조라는 버팀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앙의 자유가 없던 200년 전 그들이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교리를 실천하지 않았다면, 죽음 앞에서조차 환희와 확신에 찬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현재는 어떻게 달라져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과거라도 정확하게 바라봐야 한다. 숨 막히는 박해 뒤에 우리는 잘못한 것은 없는지, 있다면 그 또한 우리의 일부임을 인정해야 한다. 올바르게 바라보고 인정할 때 삶과 신앙이 건강해질 수 있다.

‘청년, 순교영성에 물들다’의 세 번째 여정은 해미읍성과 해미성지다. 1790년대부터 1880년대에 이르는 100년간 천주교 신자들이 대거 처형된 장소며,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이 이슬로 사라진 곳이다. 또한 오는 8월 17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시아 청년들을 만나는 현장이기도 하다.

교황 방한 준비가 한창인 이곳을 7월 24일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와 청년 신수원(요안나·29·수원 동백성요셉본당), 신재민(안젤라·21·서울 서교동본당), 신주욱(펠릭스·35·서울 서교동본당)씨가 찾아갔다. 각각 과거 현재, 미래를 짐으로 짊어진 청년들이다. 청년들은 해미읍성과 성지에서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포장된 이야기가 아닌 신앙선조들이 살았던 오롯한 삶 속에서 그들과 소통했다. 마음에 담아 뒀던 자신들의 짐을 풀어놓았다.

■ 이 시대 청년으로 산다는 것

청년 순례자들은 저마다의 사연으로 성지순례에 임했다. 내년 2월 졸업을 앞둔 신수원씨는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병마와 싸워야 했다. 폐렴으로 진통제 없이는 잠을 이룰 수 없었고 항생제 부작용에도 시달렸다. 학교를 다닐 수 없어 휴학하기 일쑤였다. 또래보다 모든 것이 느렸다. 건강을 되찾고 대학에 입학한 것이 2010년이었다. 친구들은 이미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 이제야 졸업과 진로를 고민하고 있는 그였다. 오랫동안 몸과 마음이 아팠던 수원씨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기쁘게 살았던 순교자들의 믿음이 이해되지 않았다.

“순교자들은 힘들게 살다가 억울하게 죽었잖아요. 그런데 그들의 마지막 모습들은 모두 행복했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는지 이번 기회에 느껴보고 싶었어요.”

신재민씨는 지난해 세례를 받은 새 신자다. 가족들 모두 신자지만 재민씨는 뒤늦게 세례를 받았다. 누구의 강요라기보다는 주변의 신자들에게 받은 영향으로 제발로 성당을 찾아갔다. 세례 받은 직후부터 주일학교 교리교사를 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천주교 신자들의 모습에 감동해서 신앙을 갖게 됐어요. 저 역시도 6살짜리 조카와 친구들에게 신앙의 모범이 되고 싶어요.”

신주욱씨는 화가이자 사회운동가다. 지난 4월 세월호 참사 이후 ‘진실은 침몰하지 않습니다’라는 글귀와 풍선이 달린 배 그림을 그린 장본인이다. 성지순례 당일이 세월호 참사 100일이었던 탓에 그의 마음은 묵직했다.

“왜 그들이 죽어야 했을까요? 이유를 찾을 수 없어서 정말 힘들고 괴로웠어요. 우리시대의 정의는 무엇이고, 하느님께서는 어떤 분인지 모르겠어요.”

청년 순례자들의 고민과 이야기를 전해들은 강석진 신부는 목자이자 신앙과 삶의 선배로서 이번 순례의 의미를 설명했다. 강 신부의 말은 순례의 출발점이 됐다.

“신체적 아픔과 세월호 참사 100일의 의미를 찾고 사람으로 인해 신앙이 위축되지 않기 위해 오늘 순례를 떠나는 겁니다.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고민을 안고 말이죠.”

강석진 신부는 청년 순례자들에게 “순교자의 삶을 건강하게 또 제대로 바라볼 때 우리 삶 안에서 순교영성이 부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1790년대부터 1880년대에 이르는 100여년간 박해가 진행되면서 자리개질, 생매장, 진둠벙 등과 같은 잔인한 처형 방법들이 고안됐다. 청년 순례자들은 해미성지 진둠벙에서 순교자들의 삶과 죽음을 묵상했다.

■ 삶으로 이야기 하는 순교자

강 신부와 청년 순례자들이 탄 차는 천주교 역사가 서려있는 서울 가회동과 명동을 가로질러 해미읍성으로 향했다. 2시간을 달린 끝에 도착한 해미읍성과 성지는 프란치스코 교황 맞이 공사가 한창이었다. 입구를 정비하고, 조경공사에 여념이 없었다. 청년 순례자들은 진지한 자세로 해미읍성의 역사를 되짚어 보기로 했다.

해미읍성은 조선시대 감영(각 도의 관찰사가 거처하는 관청)이 있을 정도로 큰 고을이었다. 내포지역 죄인들은 이곳으로 모였고, 죄목에 따라 처벌을 받았다. 중국 명나라의 법전인 ‘대명률’(大明律)을 따랐던 조선의 법률체계는 나름의 합리성과 일관성이 있었다.

그러나 천주교인들에게는 유독 혹독했다. 대명률에 의하면 한번에 30대까지 때릴 수 있었지만 신앙선조들은 300대를 한꺼번에 맞은 경우도 있었다. 팔다리를 잡아들어서 돌 위에 메치는 자리개질이 고안됐고, 생매장까지 자행됐다. 손발이 묶인 채 순교자들이 매달려 고문을 당했던 호야나무는 여전히 읍성 한 가운데 서 있었다.

고통과 죽음의 흔적은 너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들의 삶과 신앙 이야기는 없었다. 강석진 신부는 “순교자들이 모진 박해 속에서 신앙을 증거하고 죽었다는 사실보다는 오히려 죽음 이전에 하느님과 천주교리를 받아들이면서 얼마나 기뻐했는지를 알아야 한다”며 “그것을 닮아갈 때, 순교영성이 체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청년 순례자 한 명이 질문을 던졌다. “조선 당국은 왜 그렇게 혹독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박해했던 건가요?”

강 신부는 역사의 이면을 바라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했던 ‘오페르트 도굴 사건’에 천주교인들이 연루됐다. 이는 조상을 중요하게 여기던 당시 사람들의 반감을 일으켰고, 모질고 혹독한 박해로 이어졌다.

“지나친 열정은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될 수 있음을 묵상해야 해요. 더불어 순교를 건강하게 바라보고 이해해야 신앙인으로서 내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다른 청년 순례자는 순교자의 신앙에 대해 질문했다. “분명 박해를 피할 방법도 있었을텐데 신앙선조들이 순교를 택한 이유가 궁금해요.”

“살아 있는 하느님, 생활하는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 생동감 있는 하느님을 구체적으로 만났기에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었다”고 강 신부는 답했다.

미사 시간만큼은 남녀노소, 천민, 양반 차별 없이 모두가 화합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한 ‘형제애’가 살아 있는 공동체였다. 오는 16일 시복되는 김천애는 노비였지만 자신을 모든 이들과 평등하게 대한 주인 유항검을 통해 하느님을 봤다. 또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간 교우촌에서는 쌀 한 톨도 나눠 먹으며 사랑의 공동체를 이뤘다. 덕분에 극심한 기근에도 교우촌 신자들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고난을 극복했다.

강 신부는 “신앙선조들은 철저하게 신앙의 뿌리, 본질을 살았고, 하느님에 대한 인격적인 신앙을 갖고 있었다”고 전했다.

해미읍성과 박해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강석진 신부. 해미읍성은 내포지역의 신앙선조들을 심문하고 처형했던 곳이다.
해미성지 내 무명 순교자의 묘 앞에서 멈춰 서서 기도하고 있는 순례자들.

■ 순교자의 마음으로 살아가기

하루 종일 비가 오락가락 하는 가운데 순교자들의 삶을 좇았던 청년 순례자들은 해미성지 내 이름 없이 순교한 무명 순교자들의 묘지 앞에서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순교자들이 느꼈고 체험했던 살아 있는 하느님 아버지를 우리의 삶 안에서 만나고, 실천할 수 있기를 청했다.

순교자들의 삶을 우리 안에서 재해석할 수 있어야 순교자의 영성이 부활할 수 있다고 설명한 강 신부는 청년 순례자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순교자의 삶을 건강하게 또 제대로 바라보며, 나약함에서 드러난 주님의 강함을 체험하고, 스스로가 신앙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혼신의 힘을 다해 살아가며 주님을 드러내는 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서로 다른 이유로 성지 순례를 시작했던 청년 순례자들은 해미를 떠나면서 한결같이 고백했다.

“순교자들이 우리들에게 밀접하게 다가와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앞으로의 삶 역시 순탄하지는 않겠지만 하느님과 순교자들 안에서 나의 삶, 어두움, 나약함을 재해석해 나갈 겁니다.”

■ 해미성지는…

해미는 역사적으로 조선 초기 병마 절도사의 처소를 둔 곳으로, 중기에는 무관 영장이 현감을 겸하며 지역을 통치하던 곳이다.

한국 천주교사에 있어서 대박해로 기록된 1801년 신유박해와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을 비롯해 지속적으로 내포 지방의 천주교 신자들을 이곳에서 처형했다. 오는 16일 시복되는 인언민, 김진후, 이보현도 이곳에서 순교했다.

처형 방식은 잔인했다. 교수, 참수, 몰매질, 석형, 백지사형, 동사형을 행했고 이후 자리개질, 생매장, 진둠벙 등 잔인한 처형 방법이 고안되기도 했다.

해미성지(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274-10, www.haemi.or.kr, 041-688-3183)는 1985년 해미본당 창설 이후, 해미 순교 선열 현양회를 발족한 결과 1998년말 생매장 순교 성지를 대다수 확보했다. 이어 2003년 기념 성당을 건립해 순교자들의 유해를 보관하고 있다. 순교자들이 “예수 마리아”를 외치며 기도했던 순교지는 ‘여숫골’이라는 이름으로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성지에서는 매일 오전 11시 미사가 봉헌된다. 대중교통은 서산공용버스터미널에서 해미행 시내·외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이지연 기자,사진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