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순교자의 땅] (8·끝) 양근성지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4-06-24 수정일 2014-06-24 발행일 2014-06-29 제 2901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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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선조들의 삶과 죽음 공존하는 순교지
조숙 베드로·권 데레사 등 시복대상자 다수 살았던 터전
사제 없던 시절, 2년간 가성직제도 통해 세례·미사 봉헌
서울서 박해 피해 온 신자들 품으며 신앙 지키도록 인도
성지순례를 향하는 길에 푸른 남한강이 펼쳐졌다. 남한강은 교회가 우리 땅에 뿌리내릴 무렵 중요한 역할을 하던 길목이다. 신앙선조들은 신앙을 배우고 실천하기 위해 남한강을 따라 모여들었다. 그 강물을 따라 가다 성지에 도착했다. 신앙선조들의 교우촌과 순교지를 함께 만날 수 있는 양근성지(주임 권일수 신부)다.

성지에 들어서니 성지 마당에 굳건히 서있는 시복대상자인 조숙 베드로와 권 데레사, 두 순교자의 동상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부부인 이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당연할 듯했지만 시선이 같은 곳을 향해있음이 인상적이다. 어딜 보고 있는 걸까. 슬쩍 두 순교자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다 경솔히 눈을 돌렸음에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십자가상의 예수다.

양근 지역에서 태어난 이들은 살아서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며 살았다. 혼인날 밤 권 데레사는 ‘함께 정절을 지키며 살자’고 남편에게 편지를 건넸고, 그 뜻에 동의한 조숙 베드로는 냉담을 풀고 신앙의 길을 걷게 됐다. 그들은 궁핍한 살림 속에서도 천주교를 전파하고 신자들을 가르치며 교회의 일을 돕는데 온 힘을 다했다. 1817년 조숙 베드로가 체포되자 남편과 떨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권 데레사는 남편을 따라 옥에 갇히고, 2년의 옥살이 후 함께 참수형을 받았다. 두 부부의 굳게 다문 입술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어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신데, 제가 어떻게 그분을 배반하겠습니까? 자기 부모를 부인하는 자를 세상이 용서하지 않을 텐데, 하물며 모든 이의 어버이 되시는 분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습니까?”

다시 성전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밝은 적색 벽돌로 꾸며진 성전은 따뜻한 보금자리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이 양근 지역은 이미 상고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돼 사람들이 살아오던 곳이다. 양근이라는 지명 역시 고구려시대부터 내려오는 이름이다. 신앙선조들의 살아갔을 따뜻한 풍경이 그려진다.

시복대상자인 조용삼 베드로, 윤점혜 아가타, 홍익만 안토니오, 권상문 세바스티아노 등이 태어나고 손경윤 제르바시오가 살던 삶의 자리였다.

지금 이 땅에서는 아름다운 성전도 있고 미사도 봉헌되지만 아직 국내에 사제가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을 적에도 이 땅에서 많은 이들이 신앙을 키워가고 있었다. 특히 하느님에 대한 갈망이 컸던 이들은 사제가 없던 시절, 2년 간 가성직제도 안에서 세례를 주고, 미사를 봉헌하기도 했다. 홍익만 안토니오도 사제가 아닌 이승훈 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이후 주문모 신부를 만나 교리를 배워 자신의 집에서 비밀리에 신자들의 모임을 이어나갔다.

양근성지는 피신해 오는 이들은 품어주는 곳이기도 했다. 손경윤 제르바시오는 서울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박해를 피해 양근에 숨어 지내며 신앙을 지켜나갔다. 그러나 가족이 체포됐다는 소식에 스스로 관청을 찾아가 신앙을 고백했다.

양근성지에서 양평역 방향으로 700m가량 가면 ‘천주교 순교지’라는 간판을 만날 수 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지형은 다소 바뀌었지만 양근교 아래, 양근천과 남한강이 만나는 자리에서 많은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쳤다. 양근은 신자들의 생활터전임과 동시에 순교의 공간이었다. 신앙 안에서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듯, 신자들은 하느님 나라의 희망을 품고 살아갔다.

윤점혜 아가타와 권상문 세바스티아노는 양근에서 태어나 양근에서 순교한 성인이다.

윤점혜 아가타는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하기 위해 동정 생활을 지켜나갔다. 주문모 신부의 입국 소식을 들은 그는 서울로가 세례를 받고 동정녀 공동체를 만들어 신앙생활을 이어나갔다. 특히 스스로 엄한 극기 생활과 교리공부 묵상 기도에 열중해 많은 신자들의 모범이 됐다. 서울에서 체포된 그는 고향인 양근에서 처형됐는데 당시 그녀의 목에서 흐른 피가 우윳빛이 나는 흰색이었다고 한다.

신해박해로 부친인 권일신 프란치스코하비에르를 잃은 권상문 세바스티아노는 주문모 신부의 입국으로 신앙을 되찾아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후에는 주문모 신부가 피신할 수 있도록 양근에 있는 자신의 집에 머물게도 했다. 그는 갖은 고문에 잠시 배교하기도 했지만 이내 배교를 취소했다. 비록 흔들림은 있었지만 마지막에는 신앙을 증거하며 순교했다.

윤유오 야고보도 양근에서 순교했다. 여주 지방에서 태어난 윤유오는 권상문 세바스티아노 등과 만나 기도모임을 하며 교리를 연구했다. 또 주문모 신부가 양근을 방문할 때 찾아와 성사를 받기도 했다.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양근 포졸에게 잡혀 혹독한 형벌 끝에 참수를 당한다.

순교지를 순례하고 다시 성지를 향해 걸었다. 성지 땅에서부터 높이 하늘로 솟아있는 십자가상이 보인다. 이 땅이다. 발에 밟히는 이 땅을 순교자들도 밟았다. 그들은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살았고, 지금은 우리가 가야할 땅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다. 비록 오늘날 이 땅에서 붉은 피를 흘리는 순교는 찾아볼 수 없지만, 우리도 이 땅에서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마음을 하늘로 향해야 하지 않을까.

조숙 베드로와 권 데레사 동정순교부부 동상.
양근성지 성당.
양근교 아래, 양근천과 남한강이 만나는 자리는 많은 순교자들의 목숨이 희생된 장소다.
양근성지 십자가상.

이승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