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사제 성화의 날 특집] 2014년 한국, 사제로서의 삶

이지연 기자
입력일 2014-06-17 수정일 2014-06-17 발행일 2014-06-22 제 2900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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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는 양떼와 함께할 때 비로소 성화되지요”
신학생 때부터 매일 아침 성체조배 … 성경과 함께 하루 시작
하루 6~9 가정 방문해 이야기 메모하고 사진 찍으며 기억
“사제가 되고자 했던 때의 순수한 열정 되찾는 것이 중요”
사제의 수호성인 성 요한 비안네 신부는 날마다 10시간이 넘도록 고해소에서 나오지 않았다. 오푸스데이 창설자 호세 마리아 신부는 스페인 내전 중에도 신자들을 찾아 다녔다.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는 평생 3만 1418㎞를 걸어 다니며 복음을 선포했다.

세 사제는 늘 복음과 양떼 곁을 떠나지 않았다.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양들을 구원하기 위해 갔던 길을 그들 역시 묵묵하게 따랐다. 그 발걸음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오는 27일은 예수 성심 대축일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묵상하는 이 날은 지난 1995년 교황청 성직자성이 제정한 사제 성화의 날이기도 하다. 사제들이 정체성과 사명에 걸맞은 성성을 재발견하도록 독려하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현대의 사제들은 세속주의와 상대주의, 쾌락주의 등 시대적 징표를 무시한 수많은 유혹에 도전을 받는다. 때문에 성화를 위한 사제들의 노력은 특별한 날만을 기다리지 않는다. 매일이 사제 성화의 날이고 그리스도를 향한 구도의 시간이다.

사제 성화의 날을 맞아 매시간마다, 매일 같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완덕으로 나아가고자 애쓰는 한 사제의 하루를 함께 했다.

사제생활의 시작과 끝, 복음

새벽미사가 없는 금요일 이른 아침, 서울 포이동성당은 고요와 적막으로 가득 했다. 사제는 침묵 가운데 한 발, 한 발 제대의 십자고상으로 다가갔다. 커다란 십자가 아래 멈춰 선 사제는 한없이 작아 보였다. 한 본당의 주임사제라는 직책도, 30년 넘게 사제로서 살아온 세월도 그리스도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포이동본당 구요비 주임신부의 아침은 한결 같다. 신학생 시절부터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매일 주님과의 독대를 청했다. 대화 주제는 성경이다. 당일이나 주일 독서와 복음을 읽고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되새기며 묵상한다. 딱딱한 의자에 앉아 한 시간이 꼬박 지나도록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그 사이 신부의 하루를 동행한다고 나선 기자는 온몸이 뒤틀린다. 참을성 없는 기자가 성당의 적막을 깨도 신부는 ‘잠심(潛心)’을 유지했다.

“신학교에 입학해서 선배 신학생들에게 늘 성경을 음미하고 곁에 둬야 한다고 들었어요. 강론과 교리를 통해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고 강조하면서 말이죠.”

성체조배를 끝낸 후에도 구 신부는 여전히 말씀에 머물렀다. 프라도 사제회(프라도회:앙투안 슈브리에 신부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프랑스 리용에서 1860년 설립한 재속 사제회다. 한국 프라도 사제회는 1975년 출발했다-가톨릭대사전 참조) 회원인 그는 복음을 읽고 묵상한 내용을 노트에 기록하는 프라도회의 복음 연구를 계속해왔다. 그렇게 쌓인 노트는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프라도회 창설자 앙투안 슈브리에 신부가 20년 동안 복음 연구를 하면서 2만 페이지를 기록했다고 하니, 구 신부의 노트 수는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5년 전부터 배우기 시작한 서예는 또 다른 구도 방법이다. 정성스레 먹을 갈고 글자 크기에 따라 화선지를 접으며 선택한 성경 구절을 묵상한다. 먹 묻은 붓이 화선지를 스쳐 지나갈 때마다 구 신부 마음에도 말씀이 뚜렷하게 새겨진다. 기자가 찾아간 13일은 “엘리야야,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1열왕 19,13)는 구절을 뽑았다.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에요. 은신처를 찾아 동굴로 숨어 들어간 엘리야 예언자를 부르시고 다시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세상의 양떼 가운데로 가서 하느님의 사업을 하도록 이끄시지요.”

아침 내내 이 구절을 마음에 담은 구 신부는 엘리야 예언자처럼 사제관을 나섰다. 그리고 양떼가 있는 곳으로 찾아 갔다.

“엘리야야,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1열왕 19,31) 매일 아침 성체조배와 프라도 사제회 복음 연구를 하는 구요비 신부는 서예로도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긴다.

엘리야야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제일 먼저 찾아 간 양떼들은 성당 내 니꼴라오 어린이집 어린이들이다. 한 달에 한 번 봉헌되는 미사를 주례하며 어린이들과 만남을 이어왔다. 어린이집 미사는 최근 가정방문을 진행하면서 관할구역 내에 많은 젊은 부부가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한 구 신부가 관심을 갖는 사목활동 중 하나다.

“아이들이 성당 유치원에 다니면 자연스럽게 부모님들도 종교에 대해 알게 되는 것 같아요. 부모님들이 예비신자 교리를 받겠다고 찾아오기도 해요. 얼마 전에는 선생님들이 세례를 받았어요.”

미사가 끝나면 아이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눈다. 지난 번에는 아이들에게 안수를 받았고, 이번에는 포옹을 나눴다. “신부님 사랑해요”라는 아이들의 고백에 힘을 얻은 구 신부는 오후부터 본격적인 가정방문을 시작했다. 청계산 아래쪽 식당가에서 사업을 하는 신자들과 내곡동 새 아파트에 입주한 신자들이 방문 대상이었다. 그는 가정방문 내내 신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하나라도 놓칠 새라 챙겨간 종이에 깨알같은 글씨로 기록하고, 기도 중에 기억했다. 말수가 적은 신자들에게는 이야기꾼이 되어 하나 하나 물어보고 신자들에 대해 알아갔다. 가정방문 끝에는 꼭 사진을 찍어 성당 한 쪽에 전시하고 앨범을 만들어, 만난 신자들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사실 이런 방문이 피곤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일주일에 3일 밤낮없이 6~9개 가정을 돌아다니다 보면 녹초가 된다. 지난 겨울 독감에 걸렸을 때는 가정방문을 잠시 멈출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픈 몸을 이끌고 가정방문에 나섰다.

본당 총구역 총무 최화선(요셉피나·52)씨는 “사목이 체력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구요비 신부님을 보면서 깨달았다”며 “가정방문을 하시고 대부분의 신자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시니 본당 신자 모두가 감동했다”고 고백했다.

강남구 포이동·서초구 내곡동·염곡동·신원동·원지동·양재2동 등 서울대교구에서 관할구역이 가장 넓다고 소문난 본당이지만 그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관할지역은 아니지만 신자가 입원해 있는 병원까지 간 적도 있다. 신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간다. 어디든지 찾아가고 어떤 이야기도 경청하는 사제의 마음은 신자들에게 가 닿았다. 사제의 방문을 꺼린다는 요즘 신자들이 오히려 신부를 기다릴 정도다.

김이화(가브리엘라,47)씨는 “신부님께서 가정방문을 하시면 신자들이 모두 ‘신부님은 나를 특별하게 여기시는구나’라고 생각한다”며 “그 정도로 신자들의 이야기에 집중하시고 강압적이거나 강한 카리스마 대신 모든 것을 포용하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다가간다”고 말했다.

포이동성당 내 니꼴라오 어린이집 미사를 주례하는 구요비 신부는 미사 후 "신부님 사랑해요"라고 인사하는 아이들로부터 힘을 얻는다.

양을 통해 성화되는 목자

구 신부가 가정방문에 집중하는 이유가 있다. 보좌 때부터 해왔던 사목활동인데 구로1동본당에서 가정방문의 효과를 몸소 체득했다. “지역에 신자들은 많은데 성당에 나오지 않았어요. 아랑곳하지 않고 가정방문을 하면서 특별히 강요하지도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신자들이 알아서 성당에 나오더군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신자들의 세상살이가 주는 감동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인데도 항상 밝게 웃으며 본당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신자, 장애를 가진 가족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보여주는 신자들의 모습은 대견하고 또 대단해 보였다. 구 신부는 얼마 전 방문한 서울 내곡동 어린이병원에서 만난 어린이들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중증장애아동들을 보고 크게 놀랐는데 아이들 이름을 보니 야고보, 베드로라고 쓰여 있었어요. 그제야 ‘내가 저 아이들과 다를 게 뭐가 있나, 뭐가 특별해서 이렇게 건강한가’하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죠.”

고민 끝에 ‘찾아가는 사제로 살아가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이후 가정방문을 할 때도 더욱 힘이 났다. 지치기도 하지만 ‘복음의 기쁨’을 살아가는 신자들은 사제에게 자극이 됐다. 세상에 두 발을 딛고 서있는 사제는 세상의 양떼를 성화의 나침반으로 여겼다.

“신자들 삶의 현장으로 갔을 때 그 안에서 보화를 발견할 수 있었어요. 양들과 함께 있을 때 사제의 성화가 시작되는 것 같아요. 기쁘게 또 열심히 사는 교우들 삶을 통해 더욱 분발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후 내내 여섯 곳의 가정을 방문한 후 사제관으로 돌아온 그는 여전히 ‘쌩쌩’했다. 저녁 가정방문은 아직도 남아 있는 상태였다. 잠깐 동행하고도 녹초가 된 기자와는 대조적이었다.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구 신부는 답 대신에 성당에 전시된 가정방문 사진을 보여줬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본당 관할구역인 청계산 아래쪽 식당가에서 사업을 하는 신자 가정을 방문한 구 신부. 그들의 어려움을 듣고 함께 해결해주기 위해 노력한다.
어떤 이야기든지 경청하고, 어디든지 찾아가는 구 신부의 사목은 신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하지만 구 신부는 세상을 살아가는 신자들을 통해 성화의 보화를 얻는다고 한다. 16:00 신자 가정 방문 ②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바오로 사도의 갈라티아서 2장 20절은 구 신부의 지향이다. 예수의 현존을 완전히 보여줄 수는 없지만 신자들에게 다가감으로써 그리스도를 드러낼 수 있다는 생각에 더욱 가정방문에 집중한다.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와 김수환 추기경의 바보 이야기는 사제들의 영성이 ‘마음의 가난’에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그래서 동료 사제와 수도자, 신자들과 다 나눠야 해요. 비워야 주님께서 은총을 채워주실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나누는 구 신부 덕분에 본당에 활기가 돋는다. 사목협의회에서는 사목 아이디어가 샘솟고, 구역·반장들은 적극적으로 사목을 돕기 위해 나선다.

취재를 마치기 전, 구 신부가 생각하는 사제 성화가 무엇인지 물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우리에게 초심으로 돌아가도록 촉구하세요. 저를 비롯한 사제들이 나름대로는 애를 쓰며 살려고 노력하지만 세속주의와 물질주의, 중산층화로 삶이 변질되고 속화된 모습이 보입니다. 신학생 때, 사제품을 받을 적,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한 순수한 열정을 되찾는 것이 곧 성화가 아닌가 싶어요. 교황의 한국 방문이 우리 모두가 성화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구 신부는 기자가 돌아온 뒤에도 세 가정을 더 방문했다. 양떼들과 함께하는 양 냄새 나는 사제의 모습으로….

하루 6~9개 가정을 방문하면서도 지친 기색 없는 구요비 신부. 오후 내내 가정방문을 하고 돌아온 성당에서도 신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앞에서 그들과의 만남을 떠올렸다.

이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