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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방한, 응답하라 2014 한국교회 (2) 사제, 왕인가 종인가?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14-06-17 수정일 2014-06-17 발행일 2014-06-22 제 2900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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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권위주의에서 벗어나는데, 한국교회는 왜 아직도…
교황 방한에 즈음해 실시한 가톨릭신문 조사에 의하면, 한국교회에 가장 긴급하게 쇄신이 요구되는 것은 ‘성직자의 권위주의와 성직중심주의’로 나타났다.(가톨릭신문 6월 8일자 ‘커버스토리’ 10·11면 참조)

성직자들 스스로를 포함해, 전체 응답자 절반 가량이 지적한 이 문제는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미 수십년 전부터, 즉 19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제기됐으되, 멀리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로부터 지속적으로 우려와 경계의 대상으로 지목돼 왔지만 여전히 쇄신돼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로 평가된다.

성직자의 권위주의와 성직중심주의는 오래 전에 청산됐어야 할 해묵은 과제이다. 사제들 스스로 ‘성직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평신도의 미성숙이 이를 강화한다는 점에서 권위주의의 청산과 신앙 성숙은 함께 풀어야 할 숙제이다. 사진 박원희 기자 (petersco@catimes.kr)
교황과 교종

프란치스코 교황이 즉위한 이후, 한국 교회 안에서는 교황(敎皇) 대신 ‘교종(敎宗)’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사례가 적지 않다. 신학적으로 어느 호칭이 옳은가 하는 논의는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다. ‘교종’으로 부르고자 하는 뜻은 ‘종들의 종’이라는 본래의 취지를 담고 싶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즉, ‘왕’이냐 ‘종’이냐에 대한 물음에서 ‘종’이라는 정체성이 그 본래 직분에 걸맞다는 뜻으로 보인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교회 쇄신의 영역에서 성직자의 권위주의와 성직중심주의에 대한 논의 역시 “사제는 왕이냐 종이냐”의 물음에 대한 성찰이다.

이미 오랜 이야기, 아직도 유효한 논의이지만, 권위주의의 청산은 우리 사회의 중요한 화두였다. 정치적 권위주의는 1980년대 말 이후 ‘거의’ 청산됐고, 이후 사회 전 영역에서 권위주의는 정당성과 명분, 현실적인 세력을 상실했다. 이제 사람들은 강제적 권위에 대해서, 저항이 아니라 무시와 무관심으로 대응한다.

하지만 여전히 일각에는 ‘권위주의’의 시대착오적 관행이 잔재한다. 종교계가 대표적이다. 이미 해소됐어야 하는 과제였음에도 여전히 남아있다는 의미에서 종교적 ‘권위주의’는 ‘때 늦은 과제’이며, 더 늦기 전에 청산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긴급한 ‘시대적 요청’이다. 그리고 그것은 ‘(제국주의적인)로마보다 더 로마적인’ 한국 천주교회 안에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는 성직중심주의와 확고한 동맹을 맺고 있다.

탈 권위주의의 시대적 요청

전체주의가 종식되고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탈 권위주의는 대세가 됐다. 권위주의에 대한 도전의 선봉은 거침없는 토론과 다양한 언로였다. 사람들은 고압적 공권력에 토를 달았고, 직장 상사 앞에서 일상적으로 이견을 피력했다. 2003년 대선은 인터넷 선거였다. 월드컵이 그랬고 촛불시위가 그랬듯이, 기성 ‘언론 권력’과 달리 인터넷을 매개로 한 자유로운 의견 개진과 토론이 이뤄졌고, 미미한 개인과 소수들이 조직적인 행동에 나설 수 있었다. 그 힘은 대선의 결정적인 변수가 됐을 정도로 막강했다.

권력과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은 199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사회 전 영역으로 확산됐고, 급기야 최고의 권위 구조로 최악의 권위주의에 빠질 위험성을 항상 안고 있는 종교계로 이어졌다. 일례로, 2003년 2월 ‘종교와 사회권력’ 학술대회에서 강인철 교수(한신대)는 한국 천주교회의 ‘독특하게 한국적인 권위주의, 성직 중심주의’를 비판했다.

하지만 이 비판은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1990년대 말부터, 구체적으로는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사이버 공간에서는 교회 안의 불합리와 성직자의 권위주의적 태도들에 대한 폭로와 비판이 나타났다. 문제는 이 비판들이 교회 지도층에 의해서 진지하게 검토, 수렴되지 못했고,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도구이자 통로, 광장인 인터넷의 역기능 쯤으로 치부됐다는 점이다. 탈 권위주의적인 세상의 흐름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그것이 교회의 구조적인 변화와 개혁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때 늦은 과제

세상의 흐름에 앞서, 한국교회는 권위주의와 성직중심주의가 복음화의 저해 요인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1984년 200주년 사목회의 성직자 의안은 교회 쇄신과 복음화는 “성직자들의 쇄신과 성화가 선행돼야 한다”(2항)고 전제한 뒤 말했다. “성직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명심해 현대인에 대한 봉사의 자세로 절대자의 증인 역할을 해야 한다.”

사목회의 후 의안의 주요 문제의식과 혁신적인 내용들이 「한국천주교사목지침서」에는 극히 부분적으로만 담겼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교구 시노드들에서는 진지하게 다뤄졌다. 인천교구는 준비 단계부터 그러했고, 사제들에 대한 여론과 요구들을 최종 문헌에 담았다. 권위주의와 성직중심주의에 대한 지적이 교회의 중산층화에 대한 자아 비판과 함께 쇄신 요청에 있어서 핵심을 이루었다.

서울대교구 시노드의 성과는 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의 후속 교서 「희망을 안고 하느님께」에 담겼다. 교서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는 그리스도의 모범을 이상적인 사제상으로 제시하는 한편, 사제의 ‘일방적이고 독단적인’ 태도가 공동체의 해악이 되기도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나아가 사목회의 성직자 의안의 어투를 그대로 차용, ‘그리스도의 권위는 철저한 봉사를 위한 것’임을 지적하면서 사제들이 ‘성직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말 것’을 당부했다. (서울대교구 시노드 후속 교구장 교서 「희망을 안고 하느님께」 37항)

폐막 30주년을 맞은 200주년 사목회의의 통찰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긴급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권위주의와 성직중심주의의 청산은 ‘때 늦은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심지어 새 천년을 시작한 2000년 대희년, 주교회의는 지난 세기 동안 한국교회가 행한 잘못 7개항의 여섯 번째 항목에서도 권위주의에 빠진 성직자들의 잘못을 고백했다.

교회 밖의 평가도 비판적으로 나타났다. 10년 전인 2004년 ‘한국 근현대 가톨릭연구단’의 조사에 의하면, 천주교회의 역할에 대한 부정적 평가 중 ‘권위적’이라는 평가가 세 번째로, 천주교 내부의 가장 큰 문제점 중 ‘사제 중심적, 권위적 교회 운영’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권위적인 성직자와 미성숙한 평신도는 함께 간다

지난해 7월 브라질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라틴아메리카주교회의(CELAM)에서 한 연설에서 교회가 직면한 세 가지 유혹 중 하나로 ‘성직자 중심주의’를 지적하고 평신도의 미성숙이 성직중심주의를 조장한다고 말했다. “상당수의 평신도들에게 그리스도 신앙이 주는 자유와 성숙함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성직자 중심주의가 온존하고 있습니다.”

오랫 동안 성직자들의 권위적 태도와 자기 중심적인 교회 운영에 길들여진 평신도들은 아예 그것을 편안하게 느끼고 성직중심주의의 대상이 되기를 자청한다는 것이다. 성직자에 대한 비판을 ‘불경’으로 여기거나, 성직자들을 교회와 동일시하는 평신도들이 있는 한 권위주의와 성직중심주의의 청산은 난관에 부딪힌다.

성직자 성 추문 문제로 몸살을 앓았던 아일랜드 더블린 대교구장 디아뮈드 마틴 대주교는 지난해 4월 뉴욕 포담대학교에서 “아일랜드 교회의 쇄신은 성직주의를 극복하고 세속 사회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자발적 평신도들의 노력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아일랜드 교회가 지나치게 오래 ‘가톨릭 국가’에 안주했고 여전히 성직주의의 잔재가 남아있다며, “미래 교회의 지도력은 더 이상 고위 성직자나 교구청이 아니라 본당에서, 왕성한 평신도들의 활동에서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고도성장을 회고하는 한국교회. 만연한 권위주의로도 아직은 견딜만하다. ‘착한’ 평신도들 ‘덕분’이기도 하지만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평신도들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래교회에서 복음화의 소명이 세상 속에 사는 평신도들에게 달려 있다는 전망은 권위주의의 타파와 신앙의 성숙을 동시에 요청한다.

평신도의 양성과 교회 운영 참여 확대

여기에서 권위주의 극복을 위한 실마리 하나를 발견한다. 평신도 양성, 그리고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평신도의 교회 운영 참여 확대이다. 성직자들의 자발적 쇄신은 당연한 전제이다. 하지만 교회 문헌들에 담긴 ‘훌륭한’ 선언들과 개인 차원의 쇄신 노력이 갖는 한계를 고려할 때, 이제 변화는 구조와 제도의 개혁으로 이끌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쇄신은 교회 전체에 관한 것”(「복음의 기쁨」 26항)이며 “목표만 제시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적절한 방법들을 함께 찾지 않는다면 순전히 환상”(33항)이기 때문이다.

평신도 신학자 김혜경 박사는 “한국교회의 현재 구조로는 쇄신이 불가능하므로, 본당과 교회 운영 구조 자체가 변화해야 한다”며 “평신도 중심의 본당 사목회 운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평신도들의 성숙이 전제돼야 하지만, 그런 점에서도 평신도 양성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그는 덧붙였다.

정희완 신부(대구가톨릭대 교수)는 2012년 10월,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에서 주최한 ‘교회개혁’ 관련 심포지엄에서 7개 신학교 신학 정교수에 평신도 신학자가 한 명도 없는 현실을 들어 평신도 양성에 무관심하고 학문 영역에서도 성직자 중심주의가 드러남을 비판했다. 같은 맥락에서, 황경훈 실장(우리신학연구소 아시아평화연대센터)은 지난 5월 31일 부산에서 열린 우리신학연구소 20주년 기념 순회 행사 강연에서 ‘성직자의 신학 독점’을 비판하고 “사제라는 이유만으로 쉽게 교수가 되는” 현실을 지적했다. 그는 이어 미국 로체스터 교구 사례를 들며 “본당 운영 책임자에 평신도를 임명하고 사제는 전례와 성사를 담당하는 수평적이고 혁신적인 성당 운영 체제”를 소개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6월 9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의 지난 2006년 ‘평신도의 소명과 자세’라는 글의 한 대목은 당연하지만 핵심을 짚고 있다. “사제가 모든 세상사와 교회운영에 완벽한 전문가이거나 최고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 평신도의 전문적 견해에 귀를 기울이는 사목자와 교회 정신과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려는 평신도가 상호 협력한다면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박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