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순교자의 땅] (7) 어농성지

김진영 기자
입력일 2014-06-10 수정일 2014-06-10 발행일 2014-06-15 제 2899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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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주신 소명 끝까지 지켜낸 순교자의 땅
을묘박해·신유박해 순교자 현양
이송용 달구지·의자형틀 등 형구 전시
모진 고초 겪어낸 선조들 신앙 열정 묵상

청소년 사목 위해 ‘청소년 성지’로 지정
기도생활 체험학교·복사학교 등 진행
어농성지 순교자 묘역에는 을묘박해와 신유박해 당시 순교한 신앙선조들의 가묘가 조성돼 있다.
윤유일(바오로)
지황(사바)
최인길(마티아)
주문모 신부
윤윤오(야고보)
윤점혜(아가다)
윤운혜(루치아)·정광수(바르바나) 부부
“천만번 죽을지라도 저 십자형틀에 묶이신 분을 배반할 수 없소”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어농로62번길 148에 위치한 어농성지(전담 김태진 신부)는 1795년 을묘박해와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순교한 신앙선조들을 기리고 현양하는 성지다. 사정없이 내리치는 매를 맞으며, 배교를 강요당하면서도 순교자들은 꿋꿋이 신앙을 지켰고 그들이 남긴 말은 성지 곳곳에 아로새겨져 있다. 이곳 성지에는 조선에 최초로 성직자를 영입하고자 노력했던 교회의 밀사 윤유일(바오로)과 동료 밀사 지황(사바), 최인길(마티아)를 비롯해 주문모 신부, 윤윤오(야고보), 윤점혜(아가다), 윤운혜(루치아)와 정광수(바르바나) 부부, 강완숙(골롬바)의 가묘가 조성돼 있다.

주차장을 지나 성지에 들어서자 커다란 예수성심상이 순례자들을 환영한다. 환영을 뒤로 한 채 성당을 향해 가는데 길가에 서 있는 다양한 크기의 십자가들이 눈길을 끈다. 피정 프로그램의 일환이었을까? 십자가 여기저기에는 이름들이 적혀있다. 십자가에 자신의 이름을 적으며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 하며 성당 앞에 도착했다.

성당 앞에는 ‘아버지상’이 있는데 돌아온 아들을 따뜻이 안아주는 아버지의 인자하고 부드러운 모습이 인상적이다. 길을 따라 언덕에 오르면 형구 전시장이 나온다. 이곳에는 차꼬, 혁편, 장, 철색, 축 등의 형구가 전시돼 있으며, 옆에 커다란 사진을 통해 신앙선조들이 겪었을 법한 상황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송용 달구지와 의자형틀을 바라보며 순교자들이 겪었을 모진 고초들을 생각하니 우리가 얼마나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새삼 느끼게 해준다.

어농성지 성당 안에는 하느님의 종 8위의 초상화가 있다. 초상화를 그린 오동희 화백은 단순히 인물을 묘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정신까지 담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그 때문일까? 조용히 앉아 초상화를 바라만 보는데도 묵상이 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제대 뒤에 독특한 모양의 십자가가 순례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다 이루었다”(요한 19, 30)를 표현한 어농성지 제대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며 고개를 숙이는 바로 그 순간과 예수님께로부터 나오는 구원의 은총을 몸에서 나오는 빛과 빛살모양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어농성지는 조선교회 초창기에 신자들이 느꼈던 목자 없는 교회의 서러움을 생각하고, 교회의 미래인 청소년과 청년들이 순교자들을 본받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소명에 응답할 수 있도록 ‘청소년 성지’로 개발되고 있다.

성당에서 나와 순교자 묘역으로 가다보면 양 옆으로 펼쳐진 생태농원은 지금은 한가로워 보이지만 여름에는 여름신앙학교에 참가한 다양한 청소년들과 청년들로 북적거리는 장소다. 순교자 묘역에 들어서기 전 양쪽으로 십자가의 길이 마련돼 있다. 숲 속에서 십자가의 길을 하고 싶다면 오른쪽으로, 그렇지 않다면 왼쪽으로 가면 된다. 양쪽 모두 친절한 안내판 덕분에 따로 기도서를 준비하지 않았더라도 십자가의 길을 하는데 전혀 무리가 없다.

순교자 묘역 입구에는 성직자 없이 탄생한 조선교회에 성직자를 모셔 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 하느님의 종 윤유일(바오로)의 동상이 서 있다. 그는 1789년에 교회 밀사로 선발돼 북경에서 구베아(A. de Gouvea) 주교를 만나 사제 파견을 간청하고, 한국인 최초로 견진성사를 받았다. 1790년 5월 다시 북경에 간 그는 사제 파견 약속과 함께 성물과 포도나무 묘목 등을 받아 귀국 했으며, 이후 여러 차례 사제 영입을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1794년 12월 마침내 동료 밀사와 함께 구베아 주교가 파견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맞아들이는데 성공했으나 이로 인해 지황, 최인길과 함께 체포돼 1795년 만 35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이들의 시신은 비밀리에 강물에 던져져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

밀입국 사실이 탄로나 피신했던 주문모 신부는 하느님의 종 강완숙(골롬바)의 집을 비롯해 신자들의 집을 옮겨 다니며 비밀리에 사목활동을 했다. 주문모 신부의 지도와 열성적인 신자들의 도움으로 입국한 지 6년이 지나자 조선교회의 신자 수는 모두 1만 명에 달하게 됐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 중 붙잡힌 신자들과 운명을 같이하고자 포도청에 가서 자수를 하고 순교했다. 강완숙 역시 신유박해 중 체포돼 3개월 간 옥고를 치루고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41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비록 시신이 없는 가묘이지만 어농성지 새겨진 순교자들과 주문모 신부의 입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청년 순교자들의 순교신심은 청소년들에게 깊은 귀감이 되리라 생각한 교구는 어농성지를 청소년들을 위한 사목을 펼치는 성지로 정하고 기도생활 체험학교, 복사학교, 본당 피정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어농성지 십자가 동산에 설치된 다양한 크기의 십자가들.

김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