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순교자의 땅] (5) 요당리성지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4-04-29 수정일 2014-04-29 발행일 2014-05-04 제 2893호 4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주님 뜻에 자신 봉헌한 ‘장 토마스’ 정신 되살린다
육촌 장주기 성인에게 신앙 전수 받아 입교한 장 토마스
열심한 계명 생활에 신앙 솔선수범, ‘착한 사람’ 호칭
박해 닥치자 피신 않고 예수님 십자가 함께할 의지 보여
“만 번 죽어도 천주교 배반할 수 없다”는 말 남기며 순교
요당리성지 전경.
이제 막 씨를 뿌린 것인지 아직 싹이 돋지 않은 넓은 밭 저편으로 붉은 빛깔의 성당이 보인다. 요당리성지(전담 장기영 신부)다. 요당리성지는 순교자의 피가 뿌려진 순교지는 아니다. 다만 순교자의 씨가 뿌려진 땅이다. 이번 시복을 앞둔 장 토마스의 신앙도 여기서 뿌려졌다.

장 토마스는 수원의 느지지, 바로 이 요당리성지에서 태어났다. 서울과 충청도 내포 등지에서 신자들이 피난해오면서 형성된 교우촌이라 추정되는 요당리성지는 양간공소라고 불리며 갓등이(현재의 왕림)와 은이공소와 깊이 연계돼 활발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던 곳이다. 특히 산속으로 피해든 많은 교우촌과 달리 넓은 전답이 펼쳐진 성지지역의 특성상, 이 지역의 전답 운영으로 교회 재정을 확보하던 곳이었다.

성지에 들어서 먼저 성전을 찾았다. 성전으로 들어서는 문이 요당리성지 출신으로 신앙을 증거 하다 순교한 성인과 순교자들의 이름이 아름다운 문양이 돼 십자가를 떠받치는 형상이었다. 그 이름에 유난히 장씨가 많다. 성지가 최소한 기해박해 이전부터 장씨들의 집성촌이자 교우촌으로 자리잡고 있었고, 박해가 끝난 이후에도 공소로서 자리해왔기 때문이다.

순교자들의 이름 안에는 장 토마스의 이름도 있었고, 장주기(요셉) 성인의 이름도 함께 있었다. 십자가에서 만나는 두 순교자의 이름은 그들의 생애를 보여주는 듯했다. 장 토마스는 장주기 성인의 육촌지간으로 그와 함께 천주교 신앙을 듣고 입교했다. 그들은 참된 신앙생활을 위해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니면서 교회 일을 도왔다. 후에 장주기 성인은 충청도 배론에, 장 토마스는 진천 배티에 정착해 비록 몸은 떨어졌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하느님을 성실히 섬김으로서 한 곳을 바라봤다.

성전에 머무르며 잠시 장 토마스의 삶을 묵상했다. 장 토마스는 열심히 계명을 지키는 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또 하나 뿐인 아들에게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다. 친척, 친구 등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에 관해 말할 때는 언제나 ‘착한 사람’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의 마음이 순량했기 때문이다.

‘착한 사람’은 마냥 좋기만 한 사람의 모습은 아니었다. 장 토마스의 착한 마음은 하느님을 향할 때 그 누구보다 강인한 마음으로 변했다. 1866년 신부들을 비롯해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자 많은 이들이 다른 곳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장 토마스는 다른 곳으로 피신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 뜻에만 의지하며 가족과 함께 집에 머물렀다. 그는 안전한 집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 머물렀던 것이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에 머물며 몸만이 아니라 마음도 하느님 안에 머물고 있는지 돌아봤다.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스스로 부끄러움에 떠밀리듯 성전을 빠져나왔다. 성지 안으로 나있는 길을 따라가니 십자가의 길이 나온다. 그리스도가 잡혀가 이곳저곳 끌려가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듯, 주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긴 장 토마스는 결국 주님의 십자가를 함께 질 영광을 얻는다.

청주 포교에게 잡혀가 문초와 형벌을 받은 장 토마스는 유혹을 받는다. “천주교를 배반하면 죽이지 않고 재산도 돌려주겠다”라고 관장이 설득을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장 토마스는 단호하게 십자가의 길을 선택했다. “재산과 목숨을 버려도 천주교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그의 대답이었다. 장 토마스는 군대 진영이 주둔하는 청주로 이송돼 다시 심문을 받는다. 배교하라고 명령하는 영장 앞에서 그는 “만 법 죽어도 천주교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니 붉은 꽃들 사이로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가 보인다. 마침내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현 충북 청주 상당구 북문로 2가)로 끌려간 장 토마스는 붉은 피를 뿌리며 순교한다. 장 토마스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착한 사람’이었다. 그는 배교하려는 대자에게 “주님을 위해 천주교를 믿고 받들다가 이런 기회를 버리고 목숨을 건진다면 장차 하느님의 벌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느냐?”라며 대자도 하느님 나라에 들 수 있도록 잘 타일렀다. 그리고 52세의 나이에 순교했다.

큰 십자가 아래 순교자 묘역 앞에 섰다. 이 요당리성지에서 신앙의 씨앗을 받아 순교로 열매 맺은 장 토마스는 다시 성지로 돌아와 이 자리에 묻혀있다. 이제 장 토마스는 새로운 신앙의 씨앗이 되어 요당리성지를 찾는 순례자들의 가슴에 신앙을 심어준다.

요당리성지 장 토마스 묘지.
요당리성지 성전 입구.
요당리성지 묵주기도의 길.

이승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