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순교자의 땅] (2) 남한산성순교성지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4-03-18 수정일 2014-03-18 발행일 2014-03-23 제 2887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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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시신 돌보다 체포된 ‘한덕운’ 
그 정신 깃든 ‘영혼의 안식처’
말·행동으로 굳건한 믿음 보이며 신앙 증거
하느님께 모든 것 맡긴 채 당당한 죽음 맞아
남한산성순교성지 동문.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성지 입구를 들어서니 우리 전통방식으로 지어진 성전이 보인다. 산 중 나무들에 둘러싸인 전통 목조건물은 한가롭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절로 풍겨오지만 박해시대 이곳은 그렇게 한가로운 곳이 아니었다. 광주 유수부(留守府)의 치소(治所), 즉 지금으로 치자면 도청이 소재한 큰 도시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드나들던 이 자리는 큰 박해가 있을 적마다 수많은 순교자의 피가 흐른 순교자의 땅이다.

당시 광주는 넓다는 뜻의 광(廣)을 지역명에 사용할 정도로 넓은 지역을 관할하고 있었다. 광주는 현재 광주시 지역뿐 아니라 한강 이남의 서울시 강남·송파·강동·서초구의 대부분의 지역과 성남, 하남, 의왕 등에 이르는 지역을 담당했다. 당시 조정에서는 각 지역에 사는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고자 해읍정법(該邑正法), 즉 모든 신자들을 거주지에서 처형하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 이 넓은 지역에 사는 천주교 신자들이 이 남한산성에 모여와 목숨을 바쳤다. 광주 의일리(현 경기도 의왕시 학의동)에 살던 한덕운(토마스)도 그래서 이곳에 끌려왔다.

성지를 벗어나 산성로타리 방향으로 가면 로타리주차장에 ‘포도청 터’ 표지판을 만날 수 있다. 비록 포도청의 형체는 남아있지 않지만 죄인을 체포하고 심문하던 포도청은 죄인으로 잡혀온 한덕운이 신앙을 증거 하던 그 땅이었을 것이다. 양반 출신이었던 한덕운은 서울로 이송돼 포도청과 형조에서 진술을 하고 다시 남한산성으로 왔다. 그는 처형을 앞두고도 믿음이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기해박해와 병인박해에 수백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심문을 받던 연무관을 지나 남한산성 동문을 향한다. 동문 우측에는 제11암문이 있다. 시구문이다. 박해시대 순교자들의 시신이 이 문을 지나 계곡에 버려졌다. 수년전까지는 한덕운의 시신도 이곳에 버려졌으리라 추측했지만 사료의 기록에 따라 지금은 다른 곳에서 순교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시구문은 한덕운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을지 모르지만 이곳이야 말로 그의 진면목을 회상할 수 있는 곳이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한덕운은 교회의 동정을 살펴볼 목적으로 사기그릇 행상인으로 변장해 서울 청파동·서소문 일대를 돌아보다 순교자 홍낙민(루카)와 최필제(베드로)의 시신을 발견하고 거뒀다. 또 마음이 약해져 배교하고 석방된 홍낙민의 아들 홍재영(프로타시오)을 만나 ‘부친을 따라 순교하지 못했음’을 크게 질책하기도 했다. 그는 이후에도 순교자들의 시신을 돌보는 일을 계속해오다 체포돼 남한산성으로 끌려왔던 것이다. 남한산성순교성지가 ‘영혼의 안식처’로 선포된 것은 바로 한덕운의 그 정신에서다. 죽음을 두려워 않고 버려진 순교자의 시신을 수습해 염하던 한덕운의 모습을 시구문에서 떠올려본다.

벽위편은 1802년 1월 30일 남한산성 동문 밖에 백성들을 모아놓고 한덕운을 참수했다고 기록한다. 포도청에서 끌려나온 한덕운은 동문을 지나 끌려왔을 것이다. 옛길을 따라 닦은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널찍한 공터가 나온다. 지금 ‘하행선주차장’이 위치한 이곳은 물레방아로 곡식을 빻던 자리로 당시에도 곡식을 쌓아두기 위한 넓은 공간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곳이다. 지금은 텅빈 공간이지만 한덕운이 순교하던 당시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터다.

주차장 입구 인근에 ‘남한산성옛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물길이 나온다. 대부분의 참수가 물가에서 이뤄진 것을 생각하면 한덕운도 이 물길 어딘가에서 순교하지 않았을까. 이미 200년도 더 지나 강산이 수없이 바뀌었겠지만 이곳이 순교자의 피가 흐른 땅임에는 분명했다.

형장에 끌려갈 때 한덕운의 기록에서는 일말의 두려움도 찾을 수 없다. 형장에 끌려가는 동안 그는 턱을 괴는 나무토막을 자신이 직접 손으로 받쳤다고 한다. 오히려 그는 죽음을 앞두고 망나니에게 “한 칼에 내 머리를 베어 달라”고 부탁해 오히려 망나니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결국 벌벌 떨던 망나니는 헛칼질을 해 3번 만에야 목이 떨어졌다.

다블뤼 주교의 기록은 한덕운이 “강직하면서도 내성적이었으며 가해지는 폭력 앞에서조차 굽힐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모든 일을 행하고 열심한 천주교 신자가 되는 것이었다. 다시 돌아온 성지입구에서 순교자현양비를 바라봤다. 어쩐지 말과 행동으로 신앙을 증거한 한덕운의 굳건한 믿음이 떠오른다. 성지를 떠나며 그가 박해자들 앞에서 고백한 신앙을 읊조려본다.

“(제가 한 활동은)천주교의 교리를 깊이 믿으면서 이를 가장 올바른 도리라고 여긴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니, 지금에 와서 형벌을 당한다고 어찌 (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바꿀 생각이 있겠습니까.”

한국 전통방식으로 지어진 남한산성순교성지 성전.
산성로타리 주차장에 있는 ‘포도청 터’ 표지판.
박해시대 순교자들 시신은 ‘시구문’을 지나 계곡에 버려졌다.

이승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