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순교자의 땅] (1) 천진암성지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4-03-04 수정일 2014-03-04 발행일 2014-03-09 제 2885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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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가르침 따르며 신앙 실천한 ‘정약종’ 얼 서려
천주교회 뿌리내릴 수 있도록 이끌어 낸 주춧돌 역할
천진암 강학회 활동 통해 교리 깨닫고 기도·묵상 실천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한글 교리서 「주교요지」 펴내
천진암성지 입구. 정약종이 어린시절부터 걷던 길이다.
시복이 결정된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중 수원교구와 관련 있는 순교자는 31위로 교구 내 각 성지에는 이들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순교자들이 살아온, 순교자들이 삶을 내어놓은, 순교자들이 묻힌 땅. 순교자의 땅, 성지. 이들 성지를 순례하며 하느님의 종 31위의 삶과 신앙을 기억해본다.

정약종은 1786년 세례를 받고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며 열성적으로 신앙을 실천했다.
경기 광주 천진암성지, 하느님의 종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흔적을 찾아 산길을 오른다. 순례자들이 순례하기 좋도록 닦인 길이건만 경사가 생각보다 가파르다. 바위틈 사이로 계곡물이 흐르고 숲이 우거진 이 산길은 정약종이 어린시절부터 걷던 길이다. 정약종의 동생 정약용(요한)은 천진소요집(天眞消搖集)을 통해 이렇게 노래했다.

“(천진암에 오르는) 바윗돌 사이로 실처럼 가늘게 난 이 오솔길은(石徑細如線)

그 옛날 어린 시절 내가 와서 거닐며 노닐던 그 길인데(昔我童時游)

(중략)

이곳은 호걸(豪傑)과 명사(名士)들이 일찍이 강학하며 독서하던 곳이지(豪士昔講讀).”
천진암 강학당지 기념표석.

마재에서 태어나 자란 정약용은 어린 시절부터 천진암을 찾았다. 마재와 천진암은 직선거리로는 10여 km정도지만 한강이 가로막고 있어 어린 정약용은 형 정약전·정약종과 함께 천진암을 찾아야 했을 것이다. 이후 ‘정약용 타도’ 상소에 시달리던 35세의 정약용이 형들과 함께 천진암을 찾아 머문 기록이 있음을 생각하면 정약종 역시 10대 때부터 천진암을 자주 찾았음을 알 수 있다.

바위 사이 오솔길 끝에 마주한 곳은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 5위 묘역’. 사방이 숲과 산으로 싸여 고요한 이곳에 정약종이 묻혀있다. 정약종을 비롯해, 이승훈, 권일신, 권철신, 이벽이 나란히 묻혀있는 이곳에서 보이는 것이라곤 푸른 숲과 하늘뿐이다.

과연 참수당하는 그 순간조차 “땅을 보면서 죽는 것보다 하늘을 보면서 죽는 것이 더 낫다”며 하늘을 바라보며 순교한 정약종의 하늘을 향한 굳건한 믿음이 느껴진다.

정약종이 이곳에 묻힌 것은 1981년, 1801년 서소문 밖에서 참수된 지 180년 만에 이곳에 왔다. 예언자는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다고 했던가. 신자들이 목숨을 걸고 수습한 시신은 그가 태어나 자란 경기 남양주 마재의 친척들에게 외면당했다. 가족묘에 묻히지도 못하고 논두렁에 묘비도 없이 묻혀 ‘머리 없는 무덤’으로 불리다 1950년대에 직계후손들이 살고 있는 화성 사사리에 옮겨졌다가 천진암으로 이장된 것이다.

비록 몸이 태어난 고향땅에 묻히진 못했지만 천진암은 정약종에게 ‘신앙의 고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묘역이 있는 자리는 바로 천진암 강학회가 열리던 천진암 자리다. 정약종은 바로 이곳에서 이승훈, 권일신, 권철신, 이벽 등과 함께 교리를 배우고 행했다. 권철신(암브로시오)이 그의 문도들과 함께 시작한 천진암 강학회는 하느님의 존재와 섭리, 영혼의 신령성과 불멸성, 칠죄종을 극복하는 칠극 등을 연구하고 교리를 깨달아 기도와 하느님 공경, 묵상과 절제 등을 실천하던 곳이다.
1981년 천진암성지로 이장된 정약종 묘. 묘역 자리는 천진암 강학회가 열리던 자리이기도 하다.

다른 형제들보다 조금 늦은 1786년 세례를 받은 정약종은 교회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열성적으로 신앙을 실천했다. 그 모습은 고향을 떠나 이주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791년 신해박해의 여파와 교황청의 제사금지방침에 따라 양반 신자들이 교회를 멀리하자 정약종은 집안의 제사 강요에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한강 건너편 천진암에 가까운 경기도 광주 분원으로 이주해 살았다. 이때 역시 시복이 결정된 정약종의 큰아들 정철상(가롤로)도 이곳으로 이주했으며 정약종과 성녀 유소사(체칠리아) 사이의 자녀로 성 정하상(바오로)과 성녀 정정혜(엘리사벳)가 태어났다. 정약종은 천진암 강학회 이후에도 교리를 깊이 연구해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 상·하편을 쓰고 주문모 신부가 조직한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의 초대회장으로서 활동했다.
정약종이 한글로 쓴 최초의 교리서 「주교요지」.

정약종의 묘 앞에서 기도와 짧은 묵상을 하고 발길을 옮기니 묘역에 세워진 십자가상이 보였다. 정약종의 신앙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바로 순교의 순간일 것이다.

1801년 신유박해가 시작되면서 박해자들의 손에 그의 책 상자가 넘어가 체포된 정약종은 혹독한 형벌과 심문 속에서도 교회나 신자들에게 해가 되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의 순교는 옥중에 있는 부친의 시중을 들던 그의 큰아들 정철상의 순교로 이어졌으며 후에 아내인 성녀 유소사, 아들 성 정하상, 딸 성녀 정정혜의 순교 역시 정약종의 신앙이 그 뿌리가 됐다.

정약종의 신앙은 한 가정을 거룩한 순교의 집안으로 이끌었을 뿐 아니라 신앙의 증거와 순교로 한국교회가 이 땅에 뿌리내리도록 이끌었다. 천진암성지를 나서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성지에 안개나 내렸다. 안개가 내린 성지의 모습은 마치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이라는 성경구절을 떠오르게 했다. 지금은 어렴풋이 보이지만 마지막 날에 뚜렷하게 하느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으리라는 것을 정약종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고요한 천진암성지에 참수형을 선고 받고 서소문 밖 형장으로 가는 수레에 오른 정약종이 주변 사람들을 향해 한 말이 울려 퍼지는 듯하다.

“당신들은 우리를 비웃지 마십시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천주를 위하여 죽는 것은 마땅한 일일 뿐입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우리가 흘린 눈물은 진정한 기쁨으로 바뀌고, 당신들의 기쁨과 웃음은 진정한 고통으로 변할 것입니다.”

이승훈 기자